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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황병승 「가려워진 등짝」

by 답설재 2020. 9. 24.

 

 

 

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워서

백내장이 걸린 늙은 짜부를 들쳐업고

짜부가 짜부가

부드러운 앞발로

살 살 살 등짝이나 긁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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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詩人의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 모든 일이 다 재미있습니다.

'고백은 공허한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절박한 몸짓'으로,

'신에 대한 믿음도 없고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독특한 고백의 형식을 만드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고 표현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이든 재미있게 고백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진실임을 보여주려는 듯도 하고,

미안하고 실례일 것 같기는 하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시인의 것이라면 실연까지도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사실은 우리의 실연도 마찬가지일까요? 재미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짜부'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인의 소망과 달리 하늘이 무너지지 않은 채 시간만 갔는데도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그런대로 다 괜찮고,

더구나 지내놓고 보면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 '재미있음'이 전염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선 이제는 도저히 그 병마와 노쇠를 털고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 중에서

몇몇 안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전염시켜 줄 텐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해도

시간이 흐르고, 그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드디어 세월이 가고,

또다시 '아름답고 좋은 날'도 오고,

그렇게라도 이 무정한 세월이 간 걸 보면

다 우습고 간지럽고 그런 것…….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짜부'의 삶이 시원찮으면 당연히 보살펴주기도 하며 지내야 하는 게 사람 사는 거겠죠.

시인들 중에는 이 시인처럼

같은 일을 기왕이면 재미있고 쉽게 써주는 시인들도 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알아채지도 못하게 쓴다고 당장 뭐가 해결되고 그런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디 이런 쉽고 재미있는 시가 더 없는지 살펴보고싶습니다.

 

 

『현대문학』 2010. 2, 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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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3일, 그러니까 퇴임한 이듬해,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무슨 정신으로 이 시를 소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문학』 2010. 2, 176~177.

출전을 각주로 붙이고 어떤 글씨체로 옮겼는지 지금 보니까 너무나 엉성해서 시인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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