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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by 답설재 2020. 9. 25.

김춘수의 詩에 몰두한 적이 있다.

그의 네 번째 시집 『處容 以後』(민음사, 1982)의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 그림이 있다. 안경을 낀 깡마른 얼굴을 스케치해 준 그 화가는 나중에 자신의 소묘집 『시인의 초상』(지혜네, 1998)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김춘수 선생은 성격 면에서 매우 찬 분이다. 성격이 더운 시인도 있고, 괄괄한 분도 있고, 오종종한 서생(書生)도 있는데, 늘 수면에 얼음 같은 게 떠 있는 분이 선생이다."

"김춘수 선생이 어느 하늘 아래(옛날에 바닷가 마산이나, 뜰에 후박나무가 서 있던 대구 만촌동이나, 지금 서울 강남 아파트촌에) 계시다는 것은 마음 훈훈하다."

 

 

 

 

 

 

그러고보면 김춘수의 시에는 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차가움 안에 따듯한 마음, 섬세함이 스며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金春洙詩選 處容』(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74, 값 500원).

 

 

 

샤갈의 그림은 굳이 해설이 필요 없다고 해도 좋다면 김춘수의 시도 그렇다.

 

 

 

忍冬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적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忍冬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위 시집)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과 이루지 못한 나의 꿈들을 생각한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이루지 못한 꿈이란 불가능했던 나의 것이어서 슬프다.

그게 슬프다는 걸 써놓은 시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따스한 일인가.

 

「내가 만난 李仲燮」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處容 以後』에 실려 있다. 화가 이야기. 우리의 서귀포의 그 이중섭.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무래도 좀 미안해지는 이중섭의 이야기.

 

 

 

내가 만난 李仲燮

 

 

 

光復洞에서 만난 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