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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정은호 「에른스트의 여행」

by 답설재 2020. 9. 8.

에른스트의 여행

 

 

정은호

 

 

당분간은 이 비에 젖을 수밖엔 없겠네.”

 

발코니에서 에른스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더니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뇨, 근데 배 안 고파요." 그가 젖은 채로 발코니에 서서 대답했다. "나가서 밥 먹고 올게요." 나는 우산을 챙겨 외출했다. 로비를 나오니 날씨가 화창했다.


식당에 들어가 백반을 먹고 나오는 길에 우비 입은 사람을 봤다. 에른스트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잠시 그와 나 사이로 트럭이 지나갔고, 그는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에른스트는 없었다. 한낮이었다. 나는 병원에 가야 했다.

 

병원 가는 길에 또 우비 입은 사람을 봤다. 얼굴을 확인하려다 귀찮아져 그냥 지나쳤다.

 

의사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너무 많이 읽고 있어요. 조심해요."

 

아파트먼트 주변의 다리를 낀 강가에서 잠시 독서했다. 뭐랄까. 읽는다는 느낌이 없는 독서였다. 요즘 늘 그랬다. 선생님은 내게 여행을 제안했지만 따르고 싶지 않다.

 

다시 병원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동 복도의 창가로부터 누군가 날 쳐다본다는 기분을 느꼈다. 올려다보자 아무도 없었다.

 

"어디 있었어요?" 집으로 들어오자 에른스트가 있어 물었다. 그는 발코니에서 젖고 있었다. "몰라요, 나도." "모른다고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열흘 정도를 그렇게 보낸 것 같다. 나는 학교에 가거나 병원에 갔고, 에른스트는 발코니에 있거나 발코니에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에른스트는 발코니에 서 있었다. 나는 젖지 않았고 에른스트는 젖었다. 나는 울지 않았지만 에른스트는 가끔 우는 것 같다.

 

어느 날 에른스트는 사라졌다. 그 후로 그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고, 학교를 가거나 병원에 갔고, 카페에 가거나 집에 있었다. 뭐랄까. 쓴다는 느낌 없이 쓰며 지냈다. 가끔 병동 복도로부터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올려다보면 역시 아무도 없다.

 

"여행을 하거나, 여기에 오지 않거나, 이제 둘 중 하나는 해야 해요."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 제겐 이 모든 게 여행인 걸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어느 날 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떠나기 전날, 짐을 싸고 있는데 번개가 쳤다. 창밖을 보니 발코니에 누군가 서 있었는데, 우비 후드를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에른스트?” 내가 문을 열고 물었다. 그의 발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른스트죠?” “, 맞아요.”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에른스트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가끔씩 병동 복도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고 했다. 선생님들의 말은 이제 지겹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것 같다고, "그런데 멀리 떠나와서도, 발코니에 서 있으면 늘 창가 너머로 당신이 보였어요."

 

"내가 보였다고요?" ", 난 지금 당신과 있지 않아요." "그럼 어디에 있죠?" "몰라요."

 

나는 발코니로 나갔다. 비가 거셌고 금세 온몸이 젖었다. "무엇이 보이죠?" "똑같은 풍경이죠. 학교, 병원, 강가……." 에른스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난 해변이 보입니다."

 

다음 날 공항에서 나는 독일식 샌드위치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책을 몇 권 챙겼는데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날 에른스트는 내게 한동안 비에 젖어야 할 수도 있다고,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불행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잘 모르겠다. 젖어도 젖는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떠날 때마다 무언가 달라졌나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내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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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호 1995년 서울 출생. 2016더 멀리등단.

 

 

 

 

 

 

 

 

나의 에른스트는 나를 언짢아한다. 불행했다는 것일까?

그에겐 미안하지만 괜찮다.

나는 괜찮다.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다.

 

 

내 손으로 보여주기는 싫어서 반 년 이상 버티었다.

국어 시험 출제위원이 보면 이런 문제를 내겠지?

"에른스트는 다음 중 누구를 가리키는가?" ① 열혈청년 ②......

 

 

 

 

 

☞『현대문학』 2020년 1월호, 229~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