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호 시집 《기타와 바게트》
문학수첩 2020
묵향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나는 돈키호테, 잡을 수 없다고 하는 저 하늘의 별을 잡는
적도의 펭귄 0
벼루에서 부화시킨 난에 하얀 꽃이 피었다
마모된 자리를 찾아 B플랫 음으로 채웠다
제 몸 갈아 스민 물에서 서서히 목소리가 자랐다
노송을 머리에 꽂고 온 사향노루가 어제와 똑같은 크기의 농도를 껴입고
불씨를 건네는 새벽
그늘을 먹고 소리 없이 알을 낳는 스킨다비스 줄기 끝에 햇빛의 발걸음이 멈춘 그 시각
무장해제 된 상태로 소파에 누운 평각의 그녀가
봉황의 눈을 깨트리며 날았다
익숙한 무채색으로 난을 치듯 아침을 그렸다
향 끝에 끌어당긴 빛으로 불을 놓으면 곱게 두루마기 걸치는 묵향
단테가 잠시 머무르기로 한 지상의 낙원이 검은 호수 속에서 걸어 나왔다
코로나도 그렇고 장마도 그렇고... 마음이 스산해서 다 잊고 있었는데 시집 표지가 다시 다가왔다.
빨간 표지에 마음을 맞추자 시는 떠오르는데, 의아하다, 문장은커녕 두어 개 낱말조차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자리 잡지 않은 마음 가운데에 그림 한 폭이 그려진다.
웬만해선 보일 것 같지 않은 그림, 굳이 낙관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그림
새벽의 신선한 그림을 혼자 보고 있다는 것이 미안하다.
이 그림을 그려놓고 다시 먼 길을 떠났을 시인에게 미안하다.
어디 새로 지은 집 거실에 걸어놓고 싶은 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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