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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

《적막행寂寞行》

by 답설재 2020. 6. 28.

김원길 시집 《적막행寂寞行

청어 2020 

 

 

 

 

 

 

 

시인과 함께하던 그 저녁들로부터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허접하고 시인은 변함 없습니다.

여든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이 이런 것이구나,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빛깔은 이십대 중반의 시인이 보여주던 적막이었습니다.

 

서정(抒情)의 강물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情)이 아니었습니다.

"자, 또 한 편 써볼까?" 하고 술술 써내려갔을 듯한, 낯간지러운 '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마법

 

 

그리운 율리아나,

어이 할거나.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여인의 사랑만이 사슬을 푼다는

별난 마법에 걸려

괴물의 몸으로 빈 성에 숨어 사는

이야기 속 딱한 왕자.

 

율리아나, 그대 또한

멀리 외져 발길 없는 숲속 궁전,

백 년을 옴짝 않고 누워 잠자니

내 입김 고운 뺨에 닿기만 해도

저승같이 깊은 잠 깨어날 텐데

어이 할거나, 나도 그대도

어이 할거나, 이 마법.

 

 

이 마법에 걸린 건 이십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경포를 지났겠지요?

 

 

 

경포鏡浦를 지나며

 

 

친구여 자네도

시월 저녁 일곱 시 쯤

경포 앞 남행길을 버스로 지나면서

노을이 물든 가을 강을

본 적 있는가.

 

자네도 이 사람,

어스름 물굽이에 눈을 주다가

아득하니 잊어버린

옛 사랑의 이름,

느닷없이 나직하게 불러 본 적 있는가.

 

새삼스레 멋쩍어 낯을 붉히고

불러본 적 있는가, 씁쓰라니 옛 이름,

불혹 넘은 나이에

불러본 적 있는가.

 

 

    * 경포: 지명. 안동 내앞마을 서편, 변변천의 풍광이 빼어난 소호.

 

 

불혹 넘은 나이?

그는 이제 여든이 넘었습니다.

부인이 다시 보이겠지요?

 

 

내 아내

 

 

나는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니

아내는 다시 태어나면

남자가 되겠단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 당신 같은 남편을 만나

시중을 좀 더 잘 들겠다고 하니

아내는 남자로 태어나 나를 들볶고

구박해 보았으면 원이 없겠단다.

 

나는 들볶이고 구박을 받으면서도

남편을 위해 잘 참고 견디겠다 하니

아내는 내가 아무리 잘 해 줘도

한사코 트집 잡고 윽박질러 볼 거라 한다.

 

아내여

갈쿠리 손에 흰 머리칼 듬성한

미운 아내여.

 

어디 내생에 다시 나더라도

멀리 가지나 마오.

 

 

그런 아내가 시인을 들볶고 구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 바로 오른쪽 페이지에 ‘연애시’가 있습니다.

 

 

연애시

 

 

내 총각시절 긁적거린 연애시 어쩌다 읽고

자긴 마냥 껍데기와 산다며 한숨 짓는 아내여

그깐 연애편지도 아닌 지어낸 글 가지고

평생을 날 무안하게 만든 겁 많은 여자여

 

세상에 우째 이런 일도 다 생기나

시인에게 애인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도 안 되는 말 어디서 듣고 와서

당신도 멋진 연애시 한 편 남겨 보란다.

 

그래, 진작 그랬으면 맘 놓고 썼을 것을,

이제 여자라곤 당신밖에 없는 터에

내 시 속의 여자는 당신뿐일 테니

얼마나 멋진 시가 나올지, 나이 팔십에

 

 

그러니까 내가 보기로는 이 시집 팔십여 편의 시가 그의 생애인데 그는 굳이 이 시들을 5부로 나누었습니다(그리운 율리아나, 나는 애써 찔레라도 피우고파, 그대 설움 달래 줄 아무도 없을 때,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나는 아무 시름없이).

 

나는 나더러 그렇게 해보라면 이 시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는 그의 서정적 생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밤안개 자욱한 골목을 더듬어 올라가 그의 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면 당장 그렇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를 따라 찾아가본 어느 소설가의 과수원에서 하룻저녁을 함께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처럼 달이나 밝으면 휘파람 한두 곡 듣고 그 대신 내가 나서서 그의 시들을 이야기로 엮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뭐 이럴까 싶은 길을 청아한 모습으로 걸어온 그의 이야기.......

 

마지막에 둘 시는 물론 ‘카톡이나’.

그도 이 시를 맨 마지막에 놓았는데 이것만 봐도 그의 서정은 바로 우리의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는 이미 시인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시인에겐 미안한 말입니다.

 

 

카톡이나

 

 

우리 절대 만나지 말아요

이 나이에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아주 쎈 자석처럼 바로 붙어버려요.

보나마나 그 상처를 또 어찌하려고.

그러니 카톡이나 주고받자구요.

젊을 적 사진있음 보내주세요.

그래봐야 이삼 년, 길어봐야 사오 년

만나지는 말아요, 우리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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