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길 시집 《적막행寂寞行》
청어 2020
시인과 함께하던 그 저녁들로부터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허접하고 시인은 변함 없습니다.
여든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이 이런 것이구나,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빛깔은 이십대 중반의 시인이 보여주던 적막이었습니다.
서정(抒情)의 강물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情)이 아니었습니다.
"자, 또 한 편 써볼까?" 하고 술술 써내려갔을 듯한, 낯간지러운 '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마법
그리운 율리아나,
어이 할거나.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여인의 사랑만이 사슬을 푼다는
별난 마법에 걸려
괴물의 몸으로 빈 성에 숨어 사는
이야기 속 딱한 왕자.
율리아나, 그대 또한
멀리 외져 발길 없는 숲속 궁전,
백 년을 옴짝 않고 누워 잠자니
내 입김 고운 뺨에 닿기만 해도
저승같이 깊은 잠 깨어날 텐데
어이 할거나, 나도 그대도
어이 할거나, 이 마법.
이 마법에 걸린 건 이십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경포를 지났겠지요?
경포鏡浦를 지나며
친구여 자네도
시월 저녁 일곱 시 쯤
경포 앞 남행길을 버스로 지나면서
노을이 물든 가을 강을
본 적 있는가.
자네도 이 사람,
어스름 물굽이에 눈을 주다가
아득하니 잊어버린
옛 사랑의 이름,
느닷없이 나직하게 불러 본 적 있는가.
새삼스레 멋쩍어 낯을 붉히고
불러본 적 있는가, 씁쓰라니 옛 이름,
불혹 넘은 나이에
불러본 적 있는가.
* 경포: 지명. 안동 내앞마을 서편, 변변천의 풍광이 빼어난 소호.
불혹 넘은 나이?
그는 이제 여든이 넘었습니다.
부인이 다시 보이겠지요?
내 아내
나는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니
아내는 다시 태어나면
남자가 되겠단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 당신 같은 남편을 만나
시중을 좀 더 잘 들겠다고 하니
아내는 남자로 태어나 나를 들볶고
구박해 보았으면 원이 없겠단다.
나는 들볶이고 구박을 받으면서도
남편을 위해 잘 참고 견디겠다 하니
아내는 내가 아무리 잘 해 줘도
한사코 트집 잡고 윽박질러 볼 거라 한다.
아내여
갈쿠리 손에 흰 머리칼 듬성한
미운 아내여.
어디 내생에 다시 나더라도
멀리 가지나 마오.
그런 아내가 시인을 들볶고 구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 바로 오른쪽 페이지에 ‘연애시’가 있습니다.
연애시
내 총각시절 긁적거린 연애시 어쩌다 읽고
자긴 마냥 껍데기와 산다며 한숨 짓는 아내여
그깐 연애편지도 아닌 지어낸 글 가지고
평생을 날 무안하게 만든 겁 많은 여자여
세상에 우째 이런 일도 다 생기나
시인에게 애인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말도 안 되는 말 어디서 듣고 와서
당신도 멋진 연애시 한 편 남겨 보란다.
그래, 진작 그랬으면 맘 놓고 썼을 것을,
이제 여자라곤 당신밖에 없는 터에
내 시 속의 여자는 당신뿐일 테니
얼마나 멋진 시가 나올지, 나이 팔십에
그러니까 내가 보기로는 이 시집 팔십여 편의 시가 그의 생애인데 그는 굳이 이 시들을 5부로 나누었습니다(그리운 율리아나, 나는 애써 찔레라도 피우고파, 그대 설움 달래 줄 아무도 없을 때,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나는 아무 시름없이).
나는 나더러 그렇게 해보라면 이 시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는 그의 서정적 생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밤안개 자욱한 골목을 더듬어 올라가 그의 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면 당장 그렇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를 따라 찾아가본 어느 소설가의 과수원에서 하룻저녁을 함께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처럼 달이나 밝으면 휘파람 한두 곡 듣고 그 대신 내가 나서서 그의 시들을 이야기로 엮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뭐 이럴까 싶은 길을 청아한 모습으로 걸어온 그의 이야기.......
마지막에 둘 시는 물론 ‘카톡이나’.
그도 이 시를 맨 마지막에 놓았는데 이것만 봐도 그의 서정은 바로 우리의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는 이미 시인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시인에겐 미안한 말입니다.
카톡이나
우리 절대 만나지 말아요
이 나이에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아주 쎈 자석처럼 바로 붙어버려요.
보나마나 그 상처를 또 어찌하려고.
그러니 카톡이나 주고받자구요.
젊을 적 사진있음 보내주세요.
그래봐야 이삼 년, 길어봐야 사오 년
만나지는 말아요, 우리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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