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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여느 날, 여느 아침을 김언희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섹스와 끼니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모욕과 배신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지저분한 농담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어처구니없는 삶으로부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기 위하여 이를 갈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을 삼키듯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매 순간 소스라치지 않아도 매 순간 오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질된 고깃덩어리처럼 거죽도 뼈마디도 없이 우둘우둘 떨어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을..
2019. 9. 21.
김언희 「눈먼 개 같은」
눈먼 개 같은 김언희 눈먼 개 같은 생각, 정육점에 풀어놓은 눈먼 개 같은 생각, 어느새 하고 있는 생각, 처음 하는 것도 아닌 생각,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닌 생각, 지저분한 안주 같은 생각, 젖꼭지까지 박혀 있는 돼지 껍데기 같은 생각, 하고 싶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하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등 뒤에서 악어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생각, 그림자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생각, 구멍구멍 쥐새끼처럼 들락거리는 생각, 뼈를 갉아대는 생각, 고무장갑을 불면 튀어나오듯 튀어나오는 생각, 출처가 불분명한 생각, 다리를 절고, 혀를 절고, 자지를 절고, 심장을 절룩거리는 생각,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 어떤 생각보다 더 역겨운 생각, 여분의 입, 여분의 혀, 여분의 생식기를 가진 생각..
2019.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