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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5

김재훈 「첫사랑」 첫사랑 김재훈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면서 밤하늘의 별빛을 모두 쏟아버렸습니다 ------------------------------------------------------------------ 김재훈 1979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0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문학동네』 81호(2014 겨울) 283. 사람들이 지나가며 바라봅니다. 2019. 11. 15.
박두순 《인간 문장》 박두순 시집 《인간 문장》 언어의집 2019 설목(雪木)이 네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진시황에게 ―시안 병마용갱을 보고 그대, 미처 몰랐는가 삶은 혼자 사는 거고 외로운 것이라네 산봉우리처럼 솟은 그대 무덤도 혼자고 무덤 높이는 외로움의 높이라네 살아서 아무도 그댈 지켜주지 못했지 자객이 들이닥쳤을 때 다 도망가고 혼자 자신을 지켰지 않았던가 보시게, 죽어서 지켜 주리라던 육천 병마용사도 눈 멀겋게 뜨고 무표정하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네 그런데 누굴 믿나, 믿지 말게 그대 삶은 혼자 사는 거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것이라네 1 이건 설목이 나를 위해 쓴 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설목이 내 생애와 생각을 바라보며 '위로를 좀 해줄까?' 싶어서 궁리를 하다가 문득 진시황 무덤을 본 일이 생각나서 얼른 이 시.. 2019. 11. 12.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여느 날, 여느 아침을 김언희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섹스와 끼니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모욕과 배신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지저분한 농담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어처구니없는 삶으로부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기 위하여 이를 갈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을 삼키듯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매 순간 소스라치지 않아도 매 순간 오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질된 고깃덩어리처럼 거죽도 뼈마디도 없이 우둘우둘 떨어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을.. 2019. 9. 21.
「선물 상자」 선물 상자 문 정 희 바다 건너 첫사랑이 보내온 선물 상자를 풀고 있을 때 설렘을 되도록 아끼며 천천히 풀고 있을 때 그사이 선물은 자꾸 커지고 커져 보석 궁전! 나는 그 궁전에 사는 공주 남은 생이여! 두근두근으로 이 궁전을 가득 채워도 좋으리 곧 다시 백마가 오고 백만장자가 오고 누추한 적군들 모조리 무너뜨리면 공주의 입술은 장미! 아침 이슬 깨어나는 마술 상자 속의 눈부심을 아시는지! 그런데 마침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가위가 나타나 싹둑! 하늘 아래 상자를 개봉해버린다 보석 궁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으스스 삭풍이다 결혼식 후 수년을 함께 산 사람의 소행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반복할 수 없는 나의 첫사랑을 멋대로 열어버린 무지한 가위의 친절을 무어라 이름하는지? 제발 좀 가르쳐달라 단단히 포장된 .. 2019. 8. 13.
김언희 「눈먼 개 같은」 눈먼 개 같은 김언희 눈먼 개 같은 생각, 정육점에 풀어놓은 눈먼 개 같은 생각, 어느새 하고 있는 생각, 처음 하는 것도 아닌 생각,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닌 생각, 지저분한 안주 같은 생각, 젖꼭지까지 박혀 있는 돼지 껍데기 같은 생각, 하고 싶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하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등 뒤에서 악어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생각, 그림자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생각, 구멍구멍 쥐새끼처럼 들락거리는 생각, 뼈를 갉아대는 생각, 고무장갑을 불면 튀어나오듯 튀어나오는 생각, 출처가 불분명한 생각, 다리를 절고, 혀를 절고, 자지를 절고, 심장을 절룩거리는 생각,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 어떤 생각보다 더 역겨운 생각, 여분의 입, 여분의 혀, 여분의 생식기를 가진 생각.. 2019. 7. 10.
「나방과 다방」 나방과 다방 김 참 지하 다방 내려가는 벽에 나방이 붙어 있다. 연두색 몸통에 파란 날개 달린 나방 옆에 흰 날개에 검은 점 박힌 나방 옆에 검은 날개에 노란 소용돌이무늬 나방. 이토록 기이한 나방들 어두운 벽에 왜 이리 많이 붙어 있나. 자크 에튜의 음악이 흐르는 다방, 테이블과 찻잔에도 알록달록한 나방 그림들. 화려한 나방 구경에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주인이 나방 마니아인지 천장과 벽에도 나방이 잔뜩 붙어 있다. 누가 그린 건지 주인이 기르는 건지 물어 보고 싶은데 다방 문 열고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온다. 다방 입구부터 다방 내부까지 웬 나방이 이렇게 잔뜩 붙어 있는지 그도 잔뜩 궁금한 표정이다. 우리는 각각 담배를 꺼내 서로에게 불을 붙여주고 기이한 나방과 수상한 날씨 이야기를 한다. 중국옷.. 2019. 7. 1.
정다연 「밝은 밤의 이웃들」 밝은 밤의 이웃들                                                                                                               정다연  오늘은 언덕 위에 눕혀진 거대한 모아이 석상이 된 기분 다 지켜본 기분 이웃한 인간이 이웃해 있는 다른 인간보다 높게, 더 높게 석상을 세우려다 서롤 죽이고 죽였다는 얘기 석상보다 더 거대하게 시체와 시체로 탑을 쌓았단 얘기 섬 전체가 불탔다는 얘기 이곳은 더 이상 나무가 자라지 않아이곳은 더는 새가 날지 않아태풍이 부드럽게 새 한 마릴 납치해이끼 낀 석상 위에 산 채로 보내주는 일도 없어 인간이 멸종마저도 멸종시켰기 때문에 또다시 절벽은 절벽이지 둥지가 되진 않아종려나무는 종려나무가.. 2019. 6. 28.
박성우 「밥벌이」 밥벌이 - 박성우(1971~)  딱따구리 한 마리가 뒤통수를 있는 힘껏 뒤로 제꼈다가 괴목(槐木)을 내리찍는다 딱 딱 딱 딱딱 딱 딱딱, 주둥이가 픽픽 돌아가건 말건 뒷골이 울려 쏙 빠지건 말건 한 마리 벌레를 위하여 아니, 한 마리 버러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니, 한 끼 끼니를 위하여 산 입을 울리고 골을 울린다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中     나는 이 시를 읽고 웃음이 터졌습니다.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 웃었습니다.딱따구리의 그 모습을 떠올려주는 저 시를 읽으면 일단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웃기지 않습니까?"주둥이가 픽픽 돌아가건 말건 뒷골이 울려 쏙 빠지건 말건""한 마리 버러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니, 한 끼 끼니를 위하여 산 입을 울리고 골을 울린다" .. 2019. 5. 29.
김춘수 「내가 만난 李仲燮」 내가 만난 李仲燮  光復洞에서 만난 李仲燮은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사라지고 있었다.눈을 씻고 보아도길 위에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에 나는 또南浦洞 어느 찻집에서李仲燮을 보았다.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 시인의 네 번째 시집 『處容 以後』에 있습니다(44쪽)서귀포 혹은 부산의 쓸쓸한 거리에만 있었을 이중섭.그림을 보는 것이 미안해지는 이중섭."우리의 이중섭"이라고 해도 괜찮을까 싶은 이중섭. 그의 그림값이 올라갈수록 나는 미안합니다.그림은 아무래도 돈이 있는 사람이 가질 것인데 미안한 마음은 나도 좀 감당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고 주제넘은 일이긴 합니.. 2019. 5. 14.
「교도소에서」 교도소에서 김선태 재소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러 교도소 삼중 철창문을 들어섰을 때 불현듯 나는 밀림에서 잡혀 온 맹수들이 갇혀 있는 동물원을 떠올렸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왜 억지로 들어야만 하냐는 듯 재소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강의실에 들어와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볼 때 나는 그들 앞에 서 있는 자체가 두렵고 무서워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교도관들의 감시 아래 반쯤 고갤 숙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들은 이미 맹수가 아니었다 풀이 죽은 눈망울들이 오히려 애처로웠다 애초엔 각본대로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자고 얌전히 길들여져 다시 자유로운 세상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고 싶었으나 양심에 찔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연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만약에 그들이 인간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죄.. 2019. 5. 9.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내 들꽃은 죽음" 《밤이, 밤이, 밤이》 박상순 시집, 현대문학 2018 박상순 시인은 요즘 뭘 하고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시다! 이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내 들꽃은 죽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지중해 해변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겨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내 들꽃은 버스에서 내렸다. 내 들꽃의 지난여름. 땅속을 벗어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 중년의 여인이 .. 2019. 4. 14.
박연준 「파주, 눈사람」 2019.2.15. 파주, 눈사람 박연준 여보, 방에 좀 가봐 방에 눈이 내려요 언제부터? 우리가 잠든 시간부터, 지난해부터, 지지난 봄부터, 당신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친다 눈을 숨기려는 듯이 눈이 쌓이면서 발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고요하고 하염없네? 고요하고 하염없지 눈 쌓인 책상을 지나 눈 덮인 겨울을 지나 눈빛이 꺼진 유령들, 허리를 지나 우리는 침실 스위치 옆에 나란히 서서 두 마리, 사랑에 빠진 눈사람 눈 코 입이 사라지는데 서로 속삭인다 녹지 마세요 녹지 마렴.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가 가고 나면? 죽은 우리 둘이 와서 나란히, 눈 속에 살겠네 ―――――――――――――――――――――――――――――――――――――――――― 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등단... 2019.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