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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내 들꽃은 죽음"

by 답설재 2019. 4. 14.

 

 

 

《밤이, 밤이, 밤이》

  박상순 시집, 현대문학 2018

 

 

 

박상순 시인은 요즘 뭘 하고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시다!

이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내 들꽃은 죽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지중해 해변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겨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내 들꽃은 버스에서 내렸다. 내 들꽃의
지난여름.
땅속을 벗어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
중년의 여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 들꽃은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그런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지중해 해변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해 봄.
목련이 피고, 목련은 피고, 언덕길을 오르는
버스의 차창 밖에 목련은 피었고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내 들꽃을 감쌌고, 내 들꽃은 다시
버스에서 내렸고.

 

그런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지중해 해변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은 죽음.

 

 

 

에세이도 실렸습니다. 『현대문학』(2017년 7월호)에서 읽었었지만 그때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일부를 옮겨보았습니다.

 

내가 '화가의 눈'을 가진 것은 맞지만, 시인으로서의 나는, 화가의 도구를 손에서 내려놓고, '시인의 언어'라는 물질성을 생각한다. 나의 시는,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가 나타나거나, 시적 대상으로 보이는 어떤 현실이 다른 차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적으로 다루어지는 현실의 사건이나 대상들은 이미 한 편의 시를 향해 첫마디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고정된 의식과는 결별한다. 현실이나 기억은 하나의 동기로서 작용하지만, 시적 대상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적으로 드러난 사건과 행위 또는 대상들은 온전히 '시'의 내부에서 새로 탄생한다. 그것은 '시 쓰기'라는 행위의 내적 본질이며, 대상과 생각을 지우면서 대상과 생각과 느낌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지운다는 것은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보는 것을 전제로 독자적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 감각이나 지각적 판단이 세계와 나를 이어놓음과 동시에 풍경과 구성과 감각의 주체인 나를 소멸시킬 정도인 어떤 힘의 소용돌이에 놓이는 사건이다.

관념적인 주체와 대상을 지우는 행위에는 순수 감각이나 지각적 판단을 조율하는 언어의 물질성과 예술적 본성이 필요하다. 물질성은 의미를 비켜서는 순수 감각의 대응이며 예술적 본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미적 표출을 향한 진동을 촉발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미 지향적인 예술적 심도 구성에서 본성과 물질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적 품격을 가진 내부의 운동이다.

이것은 나의 내부에서 시적 언어가 출발하는 과정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은 이미 현실과 나의 관계에서 내적으로 변환되거나 준비된다. 순수 감각과 예술적 본성은 형식이 아닌 동력이고 순환적이거나 다발적이다. 예술은 비미적 대상을 미적으로 조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순수 감각을 통해 물질성이 파악되고 예술적 본성을 통해 활동성이 촉발된, 일차적으로 구조화된 상황인 예술적인 것들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중첩으로서의 표출이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닿을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다가와 가슴속에서 내는 소리를 듣는 것, 목적이나 개념을 넘어 그것이 말하는 것, 나에게는 그런 언어의 감각적 포착이 문학이며 예술이다. 이때, 보이지 않으며 닿을 수 없다는 것은 인식의 불가함이 아니다. 막연한 감정이나 세계의 어떤 모호한 잠재성도 아니다. 세계를 보는 순수 감각에 의해 내적으로 구조화된 냉정한 그림이며 예술적 본성이 발화한 분명한 소리이다. 그것은 다시 물리적 과정을 통해 외적 형식으로 드러나며, 형식은 다시 본성과 감각을 향해 굴절한다.

 

― 박상순 에세이 「그의 카페」 『밤이, 밤이, 밤이』(현대문학, 2018),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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