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신경림
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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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 등단. 시집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 노래』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사카다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9년 1월호 90~91.
지난 1월, 이 시를 읽고 줄곧 생각했습니다.
'이 시인이 아프구나…….'
'영 몸져누웠는가?'
이런 생각도 헸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되는 것인데, 행복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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