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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by 답설재 2019. 4. 2.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신경림



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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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 등단. 시집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 노래』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사카다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9년 1월호 90~91.




  지난 1월, 이 시를 읽고 줄곧 생각했습니다.

  '이 시인이 아프구나…….'

  '영 몸져누웠는가?'


  이런 생각도 헸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되는 것인데, 행복하다고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