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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연준 「파주, 눈사람」

by 답설재 2019. 4. 6.

                                                          2019.2.15.

 

 

 

파주, 눈사람

 

 

박연준

 

 

여보, 방에 좀 가봐

방에 눈이 내려요

언제부터?

우리가 잠든 시간부터,

지난해부터, 지지난 봄부터,

당신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친다

눈을 숨기려는 듯이

눈이 쌓이면서 발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고요하고 하염없네?

고요하고 하염없지

눈 쌓인 책상을 지나

눈 덮인 겨울을 지나

눈빛이 꺼진 유령들, 허리를 지나

우리는 침실 스위치 옆에 나란히 서서

두 마리, 사랑에 빠진 눈사람

눈 코 입이 사라지는데

서로 속삭인다

녹지 마세요

녹지 마렴.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가 가고 나면?

죽은 우리 둘이 와서 나란히,

눈 속에 살겠네

 

 

――――――――――――――――――――――――――――――――――――――――――

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열두 살 때 내 꿈은 디제이였다. 조곤조곤 이야기한 뒤 근사한 음악을 틀고, 턱을 괴고 있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밤에 깨어 있는 자를 향해. 오래된 벽이나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지붕에게. 병든 자와 건강한 자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필요 없다고 외치는 자에게. 말과 음악을 동시에, 보내고 싶었다.

 

반쯤 꿈이 이루어졌나? 시를 종이에 옮기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 디제이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디제이다. 내 시는 내가 쓰고,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이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음악과 함께 지내는, '그러면서도' 음악을 피해서 시를 쓴다는 박연준 시인의 에세이의 한 부분을 옮겼습니다.*

『현대문학』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시와 이 에세이를 읽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어느 것 한 가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하자면 세상의 무수한 사물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러니까 이해하는 건 단 한 가지도 없으면서도,

시만큼은 이해하겠다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시는 설명문처럼 다시 말하면 무슨 제품 설명서처럼 한 번 읽으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말끔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주 들어도, 보아도, 읽어도 좋은 것이 무수히 많은 걸 인정하면서도

하필 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막 대하다니, 무지막지하게 대하다니…….

 

「파주, 눈사람」은 재미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여기에 옮겼습니다.

 

슬프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가 가고 나면?

죽은 우리 둘이 와서 나란히.

눈 속에 살겠네"

 

 

 

............................................................

* '괴팍한 디제이의 음악 일기hide, ROCKET DIVE(에세이)현대문학20194월호, 170~177.

** 16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