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두순 《인간 문장》

by 답설재 2019. 11. 12.

박두순 시집 《인간 문장》

언어의집 2019

 

 

 

 

 

 

 

 

설목(雪木)이 네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진시황에게

―시안 병마용갱을 보고

 

 

그대, 미처 몰랐는가

삶은 혼자 사는 거고

외로운 것이라네

 

산봉우리처럼 솟은

그대 무덤도 혼자고

무덤 높이는 외로움의 높이라네

 

살아서 아무도 그댈 지켜주지 못했지

자객이 들이닥쳤을 때 다 도망가고

혼자 자신을 지켰지 않았던가

 

보시게, 죽어서 지켜 주리라던

육천 병마용사도

눈 멀겋게 뜨고 무표정하게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네

 

그런데 누굴 믿나, 믿지 말게

그대 삶은 혼자 사는 거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것이라네

 

 

 

1

 

이건 설목이 나를 위해 쓴 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설목이 내 생애와 생각을 바라보며 '위로를 좀 해줄까?' 싶어서 궁리를 하다가 문득 진시황 무덤을 본 일이 생각나서 얼른 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괜찮아요! 까짓 거 권력이 없으면 어때요? 돈이 없으면 어때요? 괜찮아요. 두고 보세요. 다 마찬가지예요."

 

 

2

 

설목이 이 시를 써놓았더니 부인께서 보고 이런 시 써도 괜찮은지 묻더랍니다.

설목은 그때 좀 생각해보지도 않고 '덥썩'(나처럼) 대답했을 것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죽어서 몇 번이나 흙이 된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해!"

 

설목의 부인은 진시황이 되살아나서 설목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지요.

그럼 설목은 정말 이런 시를 써도 괜찮을지 더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아니지요.

부질없는 일이지만, 설목은 '괜찮겠지? 그럼! 괜찮고 말고……. 내가 이 시로써 사람들을 좀 위로해줄 수 있느냐가 문제지. 다만 그게 내가 생각해야 할 일이지. …….' 갖가지 생각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부인으로부터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인은 설목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안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3

 

『인간 문장』

설목은 참 직설적입니다.

'인간'!

'사람'이 인간일텐데, 인간이라고 하면, 당장 똑바로 앉아야 될 것 같고, 뭔가 좀 혼을 내주려는 말 같지 않습니까?

"부디 인간이 되어라!"

"야, 이 인간아!"

쑥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팔십을 바라보는 이날 이때까지 '사람'이 되지 못한 그저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 아내는 매일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참 묘한 것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집의 모든 시가 재미있고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인간인 주제에…….

잘 났다고 건들거리는 것들이 생각나서, 그것들 중 어느 인간을 찾아가 느닷없이 이 시집의 시 한 편을, 아무것이나 한 편 읽어주고 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위로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이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4

 

설목은 대단합니다.

그 작은 체구로 모든 이를 위로할 작정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죠, 몇 명은, 이 시집의 시들을 읽어도 거의 그대로 건들거리며 살아갈 몇몇 사람은 '읽으나 마나'일 것이므로 굳이 읽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서 설목에게는 미안합니다.

어처구니없어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당신을 위로해주려고 쓴 시가 아닌데?"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다희 「두 개의 붉은 줄」  (0) 2019.11.20
김재훈 「첫사랑」  (0) 2019.11.15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0) 2019.09.21
「선물 상자」  (0) 2019.08.13
김언희 「눈먼 개 같은」  (0) 2019.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