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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다희 「두 개의 붉은 줄」

by 답설재 2019. 11. 20.

 

 

 

 

 

 

 

 

 

 

두 개의 붉은 줄

 

 

이다희

 

 

그녀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셔츠를 들어올렸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비가 내렸고, 달리기에는 가방이 무거웠다. 얇은 셔츠는 피부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셔츠를 벗고 나머지도 벗었다. 그녀가 빠져나가자 옷은 작고 납작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감쌌던 옷은 허름해 보였다. 옷은 벌써 그녀를 잊은 듯했다. 아침에 벗어둔 잠옷을 침대 옆에서 찾았다. 잠옷과 비에 젖은 옷들을 하나씩 집어 올려 손에 모았다. 모두 같은 세탁기에서 돌려질 참이었다.

 

거울 앞을 지날 때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흘끗 쳐다봤다. 거울이 깨진다는 것은 거울의 모든 경험이 깨진다는 것이다. 거울의 경험은 거울의 것이지만 거울 앞에 섰던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깨진 거울은 다시 깨질 수 없고 조각들은 여러 장의 신문지에 돌돌 말려 어두워진다. 그녀는 뜨거운 욕조 안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고 깨진 거울에 찔리면 피가 날 것이다. 거울이 깨진 경험에서 거울 빼면 어떻게 될까. 거울이 없어도 거울이 깨질 수 있을까. 처음을 두 번 할 수 있을까.

 

다시 거울 앞에서 습기를 닦아낼 때, 그녀는 두 개의 붉은 줄을 발견했다. 가슴 바로 아래를 지나는 줄과 배꼽을 가로지르는 줄을 발견했다. 가슴 바로 아래의 줄은 브래지어 자국이었고 배꼽을 가로지르는 줄은 벨트 자국이었다. 곤충은 머리 가슴 배로 나뉘지만 그녀는 두 개의 붉은 줄로 3등분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처라고 하기에는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뒤집으며 위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하얗게 변했다. 두 개의 붉은 줄이 벌어질 수 있는 한계까지 벌어졌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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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희 1990년 대전 출생. 2017년 『경향신문』 등단.

 

 

 

처음에는 이 시를, 詩라는 걸 시로 읽지 못하고 또 소설처럼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학교 다닐 때 내가 시험을 잘 보기를 기대하시던 국어 선생님이 가르친 방법으로 뭔가 해석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꼼꼼히 읽으며,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까지, 강박관념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서 일제고사에 정통한 무슨 전문적인 '교육 귀신' 같은 게 여기에 나타나서 이 시에 대해 뭔가 두어 가지를 물으면 나름대로 답은 해야만 할 듯한 약간의 조바심을 가졌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덮어 놓은 이 시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그냥 시인을 따라다녔습니다. 이제 나에게 시험을 보라고 할 사람이나 제도가 없다는 확신 같은 걸 가졌던 것일까요?

 

이번에는 재미도 좋고, 덤으로 그야말로 산전수전도 대충은 겪은 나에 비하면 너무나도 순진무구할 저 젊은 여성에게 호기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인 아니면 내가 어떻게 남의 젊은 여성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셔츠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이런 내가 아무래도 고약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 읽기를 더 즐기고 싶어서 다음에 또 보기로 하고 여기에 옮겨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즉 시인의 눈을 따라다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시는 많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누가 나에게 그런 시를 딱 한 편만 더 제시하라고 요청하기를 기대하며 숨겨 놓은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정말로 원하신다면...

다음에 그 시를 꼭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제야 당신은 이런 설명을 잘하지 못하는 나의 이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파악하시고 안심(安心)의 미소를 지으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현대문학』 2019년 11월호(90~91)에서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