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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by 답설재 2019. 9. 21.

 

 

 

 

 

여느 날, 여느 아침을

 

 

김언희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섹스와 끼니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모욕과 배신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지저분한 농담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어처구니없는 삶으로부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기 위하여 이를 갈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을 삼키듯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매 순간 소스라치지 않아도 매 순간 오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질된 고깃덩어리처럼 거죽도 뼈마디도 없이 우둘우둘 떨어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알람 없이 맞는다는 거, 이 기막힌 잠, 형언할 수 없는 잠, 말도 안 되게 진짜인 잠, 내일 없는 잠, 오오, 내일 없는 이 잠을 음미한다는 거, 이 순간보다 길지 않은 아침을, 목을 지긋이 밟아 누르는 발목 없이 맞는다는 거, 혐오 없이 증오 없이 맞는다는 거, 같잖은 고독, 같잖은 불안, 같잖은 생, 같잖은 죽음, 희미한 경멸을 띠고서 맞는다는 거, 신인 줄을 몰랐다가 신이 되어 맞는다는 거,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재미를 만끽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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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1953년 경남 진주 출생. 198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트렁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뜻밖의 대답』 『요즘 우울하십니까』 『보고 싶은 오빠』. 〈청마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이상문학상〉 〈시와 사상 문학상〉 수상.

 

 

 

이런 아침을 맞게 되겠지.

가능하다면 멀쩡한 마음으로

"같잖은 고독, 같잖은 불안, 같잖은 생, 같잖은 죽음, 희미한 경멸을 띠고서"…….

썩 괜찮을 수 있고

섭섭해할 것 없고

그런 아침을 마주할 기회가 남은 건 얼마나 괜찮은 일인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에도

"어처구니없는 삶"을 정리해주는

아쉬운 것도 모자라는 것도 돌연 다 정리해줄 아침

아무런 준비 없이도 좋을 그 아침

다시 돌아가려는가 물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할 수 있을 그 아침

 

 

 

『현대문학』 2019년 7월호 117,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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