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언희 「눈먼 개 같은」

by 답설재 2019. 7. 10.

 

2017.11.29.

 

                                                                

 

 

눈먼 개 같은

 

 

김언희

 

 

눈먼 개 같은 생각, 정육점에 풀어놓은 눈먼 개 같은 생각,

 

어느새 하고 있는 생각, 처음 하는 것도 아닌 생각,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닌 생각,

 

지저분한 안주 같은 생각, 젖꼭지까지 박혀 있는 돼지 껍데기 같은 생각,

 

하고 싶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하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등 뒤에서 악어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생각, 그림자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생각,

 

구멍구멍 쥐새끼처럼 들락거리는 생각, 뼈를 갉아대는 생각,

 

고무장갑을 불면 튀어나오듯 튀어나오는 생각,

 

출처가 불분명한 생각, 다리를 절고, 혀를 절고, 자지를 절고, 심장을 절룩거리는 생각,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 어떤 생각보다 더 역겨운 생각, 여분의 입, 여분의 혀, 여분의 생식기를 가진 생각,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생각,

 

남자도 하고, 여자도 하고, 개도 하고, 귀신도 하는 생각, 사타구니도 하고, 겨드랑이도 하고, 송과체도 하는 생각,

 

견딜 수도, 피할 수도, 떨칠 수도 없는 생각, 창자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

 

이렇게까지 집요할 필요가 없는 생각,

 

 

 

――――――――――――――――――――――――――

김언희  1953년 경남 진주 출생. 198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트렁크』『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뜻밖의 대답』『요즘 우울하십니까』『보고 싶은 오빠』. 〈청마문학상〉〈박인환문학상〉〈이상문학상〉〈시와 사상 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2019년 7월호 118~119, 126.

 

 

 

그때 아이들이 취미가 뭔지 물었을 때 그분은 생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를 좋아했다고, 늘 무언가 생각하는 게 좋았다고 덧붙이는 걸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뒤에서 그 아이들과 그분을 바라보며 '그럴 만 한 분'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후 십 수 년 간 두고두고 그 질문과 대답이 생각났고, 그게 보통 질문과 대답이 아니었구나 새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도 생각은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잡념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틈만 나면 잡념에 빠지니까 지긋지긋해질 때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으니, 누가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잡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잡념에 빠져 있다가 끝낼 것 같습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0) 2019.09.21
「선물 상자」  (0) 2019.08.13
「나방과 다방」  (0) 2019.07.01
「밝은 밤의 이웃들」  (0) 2019.06.28
「밥벌이」   (0) 201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