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선물 상자」

by 답설재 2019. 8. 13.

선물 상자

 

 

문 정 희

 

 

바다 건너 첫사랑이 보내온 선물 상자를

풀고 있을 때

설렘을 되도록 아끼며 천천히 풀고 있을 때

 

그사이 선물은 자꾸 커지고 커져

보석 궁전!

나는 그 궁전에 사는 공주

남은 생이여! 두근두근으로

이 궁전을 가득 채워도 좋으리

곧 다시 백마가 오고 백만장자가 오고

누추한 적군들 모조리 무너뜨리면

공주의 입술은 장미! 아침 이슬 깨어나는

마술 상자 속의 눈부심을 아시는지!

 

그런데 마침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가위가 나타나

싹둑! 하늘 아래 상자를 개봉해버린다

보석 궁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으스스 삭풍이다

 

결혼식 후 수년을 함께 산 사람의 소행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반복할 수 없는 나의 첫사랑을

멋대로 열어버린 무지한 가위의 친절을

무어라 이름하는지? 제발 좀 가르쳐달라

 

단단히 포장된 우편물을 끙끙대며 열고 있는

나를 돕는다며 나를 깨뜨려버린

미세한 틈새와 틈새, 거기에서

고독은 해초처럼 미끄럽게 자라는 것인지!

 

 

 

――――――――――――――――――――――――――――――――――――――――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86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응』 등.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시카다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18년 1월호 240~241.

 

 

 

 

2018년 1월 『현대문학』 표지 사진(한성필)

 

 

 

 

이 시인은 사랑, 그것도 '남자사랑'을 위해 태어났다고 확신했다.

아니, 그런 사람은 한둘이 아니겠지?

이 시인은 자신이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애써서 강조하는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두순 《인간 문장》  (0) 2019.11.12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0) 2019.09.21
김언희 「눈먼 개 같은」  (0) 2019.07.10
「나방과 다방」  (0) 2019.07.01
「밝은 밤의 이웃들」  (0) 2019.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