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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김춘추 「비공개 문건」 비공개 문건 김춘추 제목: 집단 민원 발생에 관한 건 수신: 옥황상제 발신: 염라대왕 발송일: 단기 4345년 12월 23일 아직 어려 이승도 저승도 분별 못하는 가잿골 출신 망자들이 다음과 같은 민원을 제출하였기에 이를 보고함. 다 음 숨이 찬다. 일 억 모아 줄게. 가재 두어 두름만 잡아와 다고. 고, 애띤 것이 뒷걸음질로 맥힌 숨통을 팍 뚫어 줄낀깨 기십 년은 더 살 꺼 앙이가. 올 때 참한 가잿골 바람도 한 자루 덤으로 메고 와 다고. 숨이 찬다. 추신: 본인이 직접 가잿골을 방문 확인한 결과 쌔고 쌨던 가재는 씨가 말랐음. 다이옥신만 지천이었음. 물론, 달 탐사 때 쓰던 마스크를 잊지 않았음. 끝. 제목: 상기 건에 관한 답신 수신: 염라대왕 발신: 옥황상제 발송일: (지워져 보이지 않음) 올 .. 2018. 3. 31.
김행숙 「작은 집」 작은 집 김행숙 리셋하자, 드디어 신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의 말에 순종하여 밤낮으로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려서…… 이 세상 모든 발자국을 싹 지웠네. 보기에 참 아름답구나. 그런데…… 신이란 작자가 말이지, 이 광활한 세계를 한눈에 둘러보느라 시야가 너무 넓어지고 멀어진 나머지 조그만 집 한 채를 자기 속눈썹 한 올처럼 보지 못했다지 뭔가. 옛날 옛적에 잃어버린 꽃신 한 짝과 같은 그 집에는 늙은 여자 혼자 살고 있었다네. 어느덧 늙어서 동작도 굼뜨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어 인생이 한 줌의 보리쌀 같았대. 늙은 여자 한 명이 날마다 불을 지피는 세계가 있고, 마침내 늙은 여자 한 명이 최후의 불꽃을 꺼뜨린 세계가 있어서, 신이 견주어본다면 이 두 개의 시.. 2018. 3. 23.
이승훈 「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이승훈 1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어디 가요?" 사람들은 묻지만 쓰윽 못 들은 척하고 설렁설렁 지나가네. 내가 매달렸던 운동 기구엔 다른 남자가 매달리고, 어깨 아픈 사람은 오시오. 나는 부근 벤치에 앉아 쉰다. 뚝길로는 사람들과 개들이 오고 간다. 햇볕도 오고 간다. 구름도 오고 간다. 뚝길을 오고 가는 구름들,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2 잠자리가 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사람 가는 길에 잠자리가 나네.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잠자리 나는 것 보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는 잠자리. 아니 길을 여는 거겠지. 잠자리 잠자리 길을 열고 길가엔 돌무덤이 있네. 여름 해여 내려라. 돌무덤은 말이 없고 잠자리는 날고 나는 하늘 보며 걷는다. ―――――――――――――――.. 2018. 3. 4.
「바가텔Bagatelle 2」 「바가텔Bagatelle 2」 황동규 이즘처럼 인공지능 밤낮없이 단수 높인다면 그에게 인간다움 넘겨줄 때 오지 않을까. 사람들이 휴대폰에 눈 파묻고 횡단보도 건너다 서로 부딪치기도 하는 뇌회색 거리 위로 아침놀 저녁놀이 있는 듯 없는 듯 떴다 졌다 할 것이다. 잿빛 비둘기 두엇 비실비실 땅을 쪼며 걸어 다니고 왠일인지 가깝게 들리는 먼뎃 종소리가 뭔가 봤다는 듯 비음鼻音 넣어가며 딩, 딩, 댈 것이다. '딩, 인공지능에게 넘겨줄 인간다움이 그대들에게 있는강? 차라리 인간이라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무언가 건넌 인간이 되면 어떨깜, 딩!' ―――――――――――――――――――――――――――――― 황동규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어떤 개인 날』 『풍장』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 2018. 2. 22.
백석 「고야古夜」 추위가 절정이어서 성에까지 끼어 있습니다. '이런 밤엔 어느 시인의 시를 고르는 게 좋을까' 하고 몇 권 되지도 않는 시집들을 살펴보다가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 이렇게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이젠 아무래도 내게까진 어울리지 않고 「고야古夜」가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고야古夜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아늬 산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2018. 1. 28.
「밤의 물방울 극장」 밤의 물방울 극장 김승희 배의 검은 유리창에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음이 소거된 밤의 유리창에는 지옥도 천국도 한 편의 심야 영화 같고 유리창에 아직 맺혀 있는 물방울 단 하나의 눈동자, 클로즈업, 물방울은 지금 안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다 막차를 탄 사람들 사이엔 .. 2018. 1. 12.
「사랑」 사 랑 김 언 그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어야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어든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하고 네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 네게 줄 수 없다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만 있다. 내게 없는 것만 네게 줄 수 있는 것. 그걸 꺼내어 네 품에 안겨주는 것. 내게 없다는데도 바다처럼 흔한 것. 바다처럼 넓은 것. 바다처럼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네게 안겨주는 것. 바다는 멀다. 바닷가 출신에게도 멀다. 줄 수 없기에 가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기에 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배운다면 참으로 난감한 바다가 멀리 있다. 만질 수 없는 바다.. 2018. 1. 4.
김중일 「불어가다」 불어가다 김중일 그해 그는 바람이 되었습니다. 그해 나는 바람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전국 곳곳에 떨어뜨린 머리카락들이, 밤마다 한데 모여 바람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되어 다시 길어지는 내 머리카락 끝에 부딪혔습니다. 첩첩산중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이파리 한 잎의 그늘이 되었습니다. 밤새 불어나 더 세차게 흘러가는 물결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건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의 첫날부터 바람은, 지금껏 우두커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공중이 입은 옷깃으로, 항시 멈춰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몸에 부딪힌다는 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머리카락에, 얼굴에, 목덜미에, 손등에 스치는 건 내가 아주 빠르게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7. 12. 2.
김춘수 「南天」 南天 南天과 南天 사이 여름이 와서 붕어가 알을 깐다. 南天은 막 지고 내년 봄까지 눈이 아마 두 번은 내릴 거야 내릴 거야. ― 金春洙 詩集 『南天』(槿域書齋, 1977, 54). 차를 마시러 들어가는데 '어?' 함께 점심을 먹은 시인 '설목(雪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아봤더니 南天의 저 모습에 취해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南天은…………." 함께 이야기하며 저 시와 예전의 그 시인을 생각했습니다. 2017. 11. 2.
김상미 「작은 배」 작은 배 김 상 미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라고 노래하던 가수가,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라고 노래하던 가수가, 어젯밤 아주 멀리 떠나버렸네. 혼자 남아 울고 있는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만 남기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렸네. 이 시대의 애끓는 한숨 소리처럼 깊디깊은 여름밤, 홀연히 춤추는 먼지, 허무의 장엄 속으로 떠나버렸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매혹의 뮤지션이 되어 곧 그리운 멜로디로 환생할 작별의 오선지 속으로, 캄캄한 밤이 내뿜는 혼, 미지의 쓰라린 감미甘味 속으로 떠나버렸네.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 한밤중에도 혼자 깨어 있을, 더없이 애틋하고 애잔한 제비꽃,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 아주 작은 배. 울고 있.. 2017. 10. 28.
「잿빛」 잿 빛 이기성 잿빛, 생각하면 재의 마을이 떠올라요. 그 마을엔 잿빛 여자들이 살았어요. 여자들은 커다란 드럼통에 시멘트를 반죽해서 벽돌을 만들었어요. 깨진 창문에 탁자에 낡은 접시에 잿빛이 내려앉고 하얀 팔꿈치에도 눈꺼풀에도 수북이 쌓였어요. 밤이나 낮이나 아기들은 재를 뱉어내며 울었어요. 잿빛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건 참 멀군요. 잿빛은 구름보다는 바닥에 가깝기 때문일까요? 그러니 누가 알겠어요? 사라진 재의 아이를. 친구들아, 나는 자라서 재의 아이가 되었단다. 벽돌 속에서 소리쳤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나는 거대한 반죽통 속에서 천천히 잿빛이 되었어요. ............................................................................ 2017. 10. 16.
이장욱 「원숭이의 시」 원숭이의 시 이장욱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 2017.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