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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밤의 물방울 극장」

by 답설재 2018. 1. 12.






                                    밤의 물방울 극장



                                                                                         김승희



배의 검은 유리창에 물방울들이 소리 없이 매달려 있다

음이 소거된 밤의 유리창에는 지옥도 천국도

한 편의 심야 영화 같고

유리창에 아직 맺혀 있는 물방울

단 하나의 눈동자, 클로즈업,

물방울은 지금 안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다


막차를 탄 사람들 사이엔 어떤 비애와 너그러움이 흐르는데

어떤 물방울에도 이야기가 많겠지만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손목을 잡고 주르륵 굴러떨어지고

카날 그란데, 베네치아 밤물결에 별빛이 굽이친다

배 유리창에는 물방울 속에 피곤한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져

밤의 풍경이 되어간다

카도로! 카도르로! 뱃사공의 소리가 밤을 울리고

물방울은 주르륵 굴러떨어져 대운하의 물결에 합류한다


이 허무의 무대에서 굽이치는 물결만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은 이렇게 밤의 인물화가 풍경화가 되어가는 과정

풍경이 된 모든 밤이 아름답고

배를 타고 더 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강하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물방울

이름도 고향도 없는 물방울

유서도 유산도 없는 물방을


베네치아의 밤은 카날 그란데를 흘러가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은 가고

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외롭게 라이터 켜는 소리

왈칵 별빛이 쏟아지는 소리

등대도 없는 밤바다에 물방울은 심야 극장을 이루며

캄캄한 바다 저 너머로

검은 관처럼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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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1952년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등.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8. 1. 232~233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적셨던, 그러다가 모든 걸 알게 된 노래 같았습니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저절로 저 시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서글플 때, 혹 비장감을 느끼게 될 때 이 노래는 어떻게 들릴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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