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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백석 「고야古夜」

by 답설재 2018. 1. 28.

 

 

 

추위가 절정이어서 성에까지 끼어 있습니다. '이런 밤엔 어느 시인의 시를 고르는 게 좋을까' 하고 몇 권 되지도 않는 시집들을 살펴보다가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

 

이렇게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이젠 아무래도 내게까진 어울리지 않고 「고야古夜」가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고야古夜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아늬 산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밭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늬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여 다름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워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우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워 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는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녀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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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의 낱말풀이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하는 사람.

날기멍석 낱알을 널어 말릴 때 쓰는 멍석. '날기'는 낱알의 평남 방언.

니차떡 '찰떡' '인절미'의 평북 방언.

청밀 꿀.

조마구 조막. '조무래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재밤 '재밤중'의 준말. '한밤중'의 평안 방언.

삿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의 가장자리. '삿'은 '삿자리'. 곧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말한다.

쇠든 밤 새들새들해진 밤. 말라서 생기가 없어진 밤. '쇠들다'는 '새들새들하다'에서 온 말이다.

밝어먹고 발라먹고. '밝다'는 '발다'의 평안 방언.

은행여름 은행나무 열매. '여름'은 '열매'의 고어. 평안 방언.

광대넘이를 뒤이고 물구나무를 섰다 뒤집으며 노는 모습을 말한다.

평풍 '병풍'의 평안 방언.

천두 천도복숭아.

쩨듯하니 환하게.

냅일날 납일臘日. 동지 뒤의 셋째 미일未日. 대개 음력으로 연말 무렵이 되는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냅일눈 납일에 내리는 눈. 이 눈을 받아 녹인 납설수臘雪水는 약용으로 썼다. 납설수로 눈을 씻으면 안질에도 걸리지 않으며 눈이 밝아진다고 믿었고, 납설수로 장을 담그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하여 장을 담글 때도 사용했다.

곱새담 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은 담. '곱새'는 '용마름'의 평북 방언.

버치 자배기보다 조금 깊고 아가리가 벌어진 큰 그릇.

대냥푼 큰 양푼.

눈세기물 '눈석임물'의 평안 방언. 눈이 녹아서 된 물.

진상항아리 가장 소중한 항아리.

갑피기 '이질'의 평북 방언. 함경 방언은 '가피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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