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이승훈
1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어디 가요?" 사람들은 묻지만 쓰윽 못 들은 척하고 설렁설렁 지나가네. 내가 매달렸던 운동 기구엔 다른 남자가 매달리고, 어깨 아픈 사람은 오시오. 나는 부근 벤치에 앉아 쉰다. 뚝길로는 사람들과 개들이 오고 간다. 햇볕도 오고 간다. 구름도 오고 간다. 뚝길을 오고 가는 구름들, 나는 설렁설렁 지나가네.
2
잠자리가 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사람 가는 길에 잠자리가 나네. 가던 길 멈추고 서서 잠자리 나는 것 보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는 잠자리. 아니 길을 여는 거겠지. 잠자리 잠자리 길을 열고 길가엔 돌무덤이 있네. 여름 해여 내려라. 돌무덤은 말이 없고 잠자리는 날고 나는 하늘 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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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1942년 강원 춘천 출생. 2018년 1월 16일 영면. 1963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물 A』『환상의 다리』『당신의 초상』『사물들』『당신의 방』『너라는 환상』『길은 없어도 행복하다』『밤이면 삐노가 그립다』『밝은 방』『나는 사랑한다』『너라는 햇빛』『인생』『비누』『이것은 시가 아니다』『화두』『이승훈 시선집』『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이승훈 평론선집』. 시론집 『반인간』『시론』『비대상』『포스트모더니즘 시론』『모더니즘 시론』『해체시론』『모더니즘의 비판적 수용』『탈근대주체이론 과정으로서의 나』『정신분석 시론』『선과 하이데거 』 『이승훈의 해방시학-라캉으로 시 읽기』『영도의 시쓰기』등.*
― 유성호 「이승훈 시학의 전개와 성과」(『現代文學』 2018년 2월호 232~243)에서 옮겨씀.**
2018. 1. 22.
저렇게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쉬기가 어려운지,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좋은 시가 아니겠지?
그렇게 쉬기가 어려울 것 같은 부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파트 주변에 벤치가 많은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걸핏하면 산책 좀 하라는데도 그렇다.
*『現代文學』2018년 2월호 254~255쪽 작가연보에서 발췌.
** 원문 출처는『열린시학』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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