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

김행숙 「작은 집」

by 답설재 2018. 3. 23.

작은 집

 

 

김행숙

 

 

  리셋하자, 드디어 신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의 말에 순종하여 밤낮으로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려서…… 이 세상 모든 발자국을 싹 지웠네. 보기에 참 아름답구나. 그런데…… 신이란 작자가 말이지, 이 광활한 세계를 한눈에 둘러보느라 시야가 너무 넓어지고 멀어진 나머지 조그만 집 한 채를 자기 속눈썹 한 올처럼 보지 못했다지 뭔가. 옛날 옛적에 잃어버린 꽃신 한 짝과 같은 그 집에는 늙은 여자 혼자 살고 있었다네. 어느덧 늙어서 동작도 굼뜨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어 인생이 한 줌의 보리쌀 같았대. 늙은 여자 한 명이 날마다 불을 지피는 세계가 있고, 마침내 늙은 여자 한 명이 최후의 불꽃을 꺼뜨린 세계가 있어서, 신이 견주어본다면 이 두 개의 시간은 숲으로 가는 길과 바다로 가는 길이 갈라지듯이 점점 더 멀어지는가. 하늘과 땅이 가장 멀어지는…… 그곳에서 맞붙듯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가. 그리하여 신이 그윽하게 굽어보면 분별없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속 세상이었을까. 잊은 것이 퍼뜩 생각난 듯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네. 이번엔 검은 눈이 비스듬히 내리기 시작하네.

 

 

―――――――――――――――――――――――――――――――――――――――――――――

김행숙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2018년 1월호 271면. 시인 소개는 291면(『현대문학』 핀 시리즈에 소개된 시)

 

 

 

 

 

 

 

 

눈 덮인 세상은 늘 불합리한 면까지 다 덮어버린 듯해서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불합리들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서? 그런 것들을 그냥둬?'

불쑥불쑥, 불손한 생각이 일었습니다.

 

눈이라도 오는 건 꽤나 좋은 일이었습니다.

 

 

 

 

 

'詩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활세계에서 춘천 가기」  (0) 2018.04.20
「비공개 문건」  (0) 2018.03.31
「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0) 2018.03.04
「바가텔Bagatelle 2」  (0) 2018.02.22
백석 「고야古夜」  (0) 2018.01.28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