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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중일 「불어가다」

by 답설재 2017. 12. 2.

불어가다

 

 

김중일

 

 

그해 그는 바람이 되었습니다.

그해 나는 바람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전국 곳곳에 떨어뜨린 머리카락들이, 밤마다 한데 모여 바람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되어 다시 길어지는 내 머리카락 끝에 부딪혔습니다.

첩첩산중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이파리 한 잎의 그늘이 되었습니다.

밤새 불어나 더 세차게 흘러가는 물결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건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의 첫날부터 바람은, 지금껏 우두커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공중이 입은 옷깃으로, 항시 멈춰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몸에 부딪힌다는 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머리카락에, 얼굴에, 목덜미에, 손등에 스치는 건 내가 아주 빠르게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그날의 바람처럼 붙박여 있는데, 내 몸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불어가고 있습니다.

바위 같은 바람에 쓸리고 부딪치며 온몸이 불어갑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며 불어갑니다. 손톱이 길어지며 불어갑니다. 내가 불어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바람에 어깨를 부딪치며 나무들이 불어갑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새들을 퉤퉤 뱉어가며 불어갑니다.

그해에는 함께 가던 그가 바람처럼 완전히 멈춰졌습니다.

그해부터 함께 가던 그가 바람처럼 매 순간 내게 부딪혀옵니다.

그 때문에 내 몸이 이 순간도 불어간다는 것을 압니다.

 

 

 

――――――――――――――――――――――――――――――

김중일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국경꽃집』『아무튼 씨 미안해요』『내가 살아갈 사람』.

 

 

 『현대문학』 2017년 8월호.

 

 

 

 

 

모든 일들이 바람이었구나생각하니까 지금까지의 일들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생각하고, 읽고, 쓰고, 이야기하고, 경험하고 한 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 같은 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마침내 바람으로 드러났구나…….

 

공허하다니, 즐거워하며 가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또 궁금한 것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면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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