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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

「원숭이의 시」

by 답설재 2017. 8. 31.

원숭이의 시

 

 

이장욱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넘어서는 것

여기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있다는 것

 

원숭이의 시에 당신이 등장한다고 하자.

내가 그 시를 썼다고 하자.

내가 동물원의 철창 밖을

밤의 저편을

당신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

이장욱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대산문학상〉 수상.

 

 

 

『現代文學』 2017. 8. 100~101.

 

 

원숭이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 원숭이도 하루를 보낸다는 이야기

그래서 여기 한 마리 원숭이가 또 있다는 이야기

그런 나를 누군가 관람하고 있다고 하자는 이야기

 

원숭이는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

이게 바로 슬픔인지

 

 

 

 

2015.8.20. 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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