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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고영민 「돼지고기일 뿐이다」 돼지고기일 뿐이다 고영민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는데 건진 돼지고기 한 점에 젖꼭지가 그대로 붙어 있다 젖꼭지는 마치 처음 만난 나에게 꾸벅 인사하는 아이의 머리통처럼 보인다 돼지의 젖꼭지는 몇 개일까 이것은 새끼를 먹이던 그중의 하나 밥뚜껑에 건져내놓고 다시 천천히 밥을 먹는다 그냥 돼지고기일 뿐이다 돼지고기일 뿐이다 ― 시집 (문학동네)에서 《한겨레》 2016.1.8. 23면에서 옮김. 짐승들도 생각을 한다는 걸 읽었습니다.1 그럼 영혼도 있다는 얘기일까요? 어쩌면 다 쓸데없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 시를 찾아 다시 읽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고 있는 시인을 생각합니다. 무심코 나를 잠깐 바라보았던 나의 그 돼지들이 무심한 나 대신 굳이 저 고영민 시인을 찾아가 다른 돼지들과 섞여 함께 꿀꿀거리면 세상에!.. 2017. 8. 17.
정양 「달밤」 달 밤  정 양  떠난 사람 보고 싶어서풀들은 더 촘촘히 돋아나텃밭도 마당도 장독대도 두엄자리도아무 데도 안 가리고 우거지더니우거지다 지친 풀들 길 잃고아무데나 드러눕는 빈집에달빛이 가득 고였다한세상 번번이 길 잘못 들어돌아올 길 영영 잃어버린 얼굴이달빛 쓰러지는 풀밭에 드러눕는다   ――――――――――――――――――――――――――――――정양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등단. 시집 『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빈집의 꿈』『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눈 내리는 마을』『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나그네는 지금도』『철들 무렵』『헛디디고 헛짚으며』 등. 〈백석문학상〉〈구상문학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7년 7월호.        떠난 사람 보고 싶은 건 사오십 년 전이나 지금.. 2017. 8. 6.
유진목 「여주」 여 주   유 진 목   녹색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어 창밖은 볼 수가 없고  여기는 오래된 집이야  그늘에서 입을 맞추면 돌연 살갗이 일어서는  욕실 바닥의 물때를 지울 때  당신은 천천히 늙어야 해  생각하면 언제나 아름다웠어  젖은 거울을 손으로 쓸면 거기서 나는 여름이었고  여주는 열린다  그의 얼굴은 잘 알고 있지만 내 얼굴은 거의 모르고 있다  이렇게 씨를 없애면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해  찬장에 든 것은 그대로 먹으면 되고 맨 아래 술병에도 남은 술이 있어  젖은 발로 당신은 부엌에 들어왔던 것 같아  이걸 다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  죽어도 좋을 때까지 당신은 살아 있어야 해   ――――――――――――――――――――――――――――――유진목 1981년 서울 출생. 2016년 시집 『연애의.. 2017. 7. 24.
박남원 「내 안에 머물던 새」 내 안에 머물던 새   박 남 원  내 안에 한동안 머물던 새는반은 떠나고 반이 남았다.그래서 다 떠나버린 것도,다 남아 있지도 않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한다. 꼭 반은 떠나고 반은 남았으므로나는 온전히 너를 떠나보낸 것도내 안에 온전히 잡아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다 날아가라고, 다 날아가버리라고대문을 열어두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으나그러면 다 떠나버릴 줄 알았던 너는 이번에도 단지 반만 떠나고여전히 반은 계속 남아 있다. 다 떠나버리거나 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너는하루 종일 바람 부는 바다 기슭 같은 데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해가 저물면 기어이 내 가슴의 문을 열고 날아 들어와내 심장의 벽에 모이를 쪼며 밤새 쿡쿡쿡 바늘을 찔러댄다. 한번 와서는 어디로 가지도 않고밤이 다 가도록 모이를 .. 2017. 7. 8.
김안 「겹」 겹  김 안  우리는모든 끔찍한 일들이 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우리가 보아야만 했던그 모든 비극과 단순과 비참들이. 그리고일상을 나누던 이 방에서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도 싸우는 이유조차도죽이고 싶도록죽고 싶도록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그렇게.그렇게우리는 말보다 빠르게 단죄하며 개종하며입을 다물고선살기 위해 조응하며살기 위해 악마가 되어가는 우리라는 겹의 구조용서와 망각을 강요하는 국가라는 장소와현실의 책들이 겹쳐지듯우리는 애초에 불행의 겹으로 태어났는지도.홀딱 벗은 채로야만 터지는성스러운 사랑의 괴성과 공포스러운 세속의 괴성.그리고방 안 가득 부풀어 오르던 정직한 살과살에 가까운 살들이 기어이 만나는 불행의 체위.우리가 나누었던 말과,말이 아니었던,말의 그물을 물고기처럼 빠져나가던 말의 잔해*들이겹의 구조.. 2017. 7. 4.
김종길 「聖誕祭」 聖 誕 祭    金 宗 吉   어두운 방 안엔발갛게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스런1 옷자락에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그날 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그 때의 아버지 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2 찾아볼 길 없는聖誕祭 가까운 거리에는이제 소리없이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山茱萸 붉은 알알이아직도 내 血液 속에 녹아 .. 2017. 6. 22.
서대경 「굴뚝의 기사」 굴뚝의 기사 서대경 뿌연 형광등 불빛. 머리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는 소리. 서대경 씨는 쓰던 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본다. 천장의 벽지가 갈라지더니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혹시 꼬마 놈 하나 못 봤소?」 머리가 말한다. 「꼬마 놈이라니 누구 말이오?」 「굴뚝의 기사 말이오.」 「당신은 누구요? 왜 굴뚝의 기사를 찾소?」 「옆방 사는 사람인데, 그놈이 또 내 담배를 훔쳐 갔소.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걸 보니 형씨도 그놈한테 당했나 보구려.」 「그까짓 담배 없어진 걸로 남의 방에 함부로 머리를 들이밀어도 되는 거요?」 머리가 천천히 돌면서 방 안을 살핀다. 「그러니까 정말로 못 봤소?」 서대경 씨는 말없이 머리를 노려본다. 「그럼 담배 한 개비만 얻을 수 있소?」 서대경 씨가 책상 위의 책을.. 2017. 5. 12.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김 행 숙     신발장의 모든 구두를 꺼내 등잔처럼 강물에 띄우겠습니다  물에 젖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진 구두를 위해 슬피 울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발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그 곁에서 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었습니다  책들이 불타는 밤입니다  말들이 파도처럼 부서지고  긁어모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밤, 뜨거운 악몽처럼 이것이 나의 밤이라면 저 멀리서 아침이 오고 .. 2017. 5. 11.
송재학 「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마니차」 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마니차 송 재 학 경전을 읽지 않고도 경전의 냄새만으로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시큼한 정강이끼리 덧대는 사람과 눈썹이 마주치는 사람이 라마승들과 함께 밤을 꼬박 지새울 때 눈먼 이들의 눈먼 부처가 있다면 귀 먼 이들의 애먼 부처도 있다 나무라는 부처 돌이라는 부처 혹은 흙이라는 부처도 숨을 쉬었다 혓바닥에 경을 새겼던 사람과 제 몸에 본생담을 그린 사람이 물소리 바람 소리라는 잎사귀를 보았다면 나무에 새긴 나무 돌에 새긴 돌 흙으로 빚은 흙처럼 티베트 글자 장문藏文은 희로애락의 순서이다 경을 바람에 옮기거나 하늘에 올리거나 글씨를 문지르고 닦듯이 누군가 여위어가는 등짝을 내놓았다 오래되지 않은 여인의 주검도 나왔다 병을 이겨낸 보시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얼굴 생김새처럼 크고 작은.. 2017. 3. 26.
장이지 「남천南天」 남천南天  장이지  옥상에 눈이 쌓여 있다. 식당 여자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옥상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논다. 마당은 두고 좁은 옥상에서 왁자그르르하다. 언 손의 여자가 눈을 굴린다. 젖은 장갑을 나눠 낀 두 아들이 눈을 굴린다. 눈사람 둘이 나란히 선다. 빨간 단추 눈을 달아주었더니 자기들끼리 마주 보고 웃는다. 여자는 아들들을 내려다본다. 쨍한 무지개의 머플러가 옥상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와 유쾌한 사람들의 추운 목을 포근히 감싼다. 눈 녹은 자리 벌써 움푹하다. 자꾸만 갈쌍갈쌍한 것이 어디서 온다. 엄마. 그날은 영문 모르고 좋아했는데 장사도 하지 않고 엄마는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을까. 마음의 눈이 내려 쌓이는 어떤 추운 날에는 동그란 등의 엄마 눈사람을 하나 만들어 마음의 옥상 한쪽에 세워두고.. 2017. 3. 18.
이기성 「살인자의 시집」 살인자의 시집 이기성 안녕 프랑수아, 당신이 보냈다는 시집을 기다렸어요. 오늘도 시는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사이에 나는 이사를 했고, 킁킁거리는 이웃들은 나의 우편함에 관심이 많아요. 프랑수아, 당신은 먼 나라의 시인이고, 나는 당신의 말을 몰라요. 그래도 당신의 시가 내게 도착했다면 나는 기뻤을 거예요. 모르는 나라의 말로 쓴 시가 나를 기쁘게 하다니, 놀랄 것도 같았어요. 프랑수아, 당신의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의 혀에서 솟아난 말은 어디로 흘러갔을까요? 당신의 시가 밤하늘에서 한 글자씩 흩어져 내리는 꿈을 꾸어요. 하얀 말들이 창문에 쌓이고, 그것은 눈이 내리는 풍경보다 아름다울 것 같아요. 프랑수아, 나는 아침에도 기다리고 밤에도 기다렸어요. 어쩌면 당신의 시에서는 살인자가 눈 속에 피 묻.. 2017. 2. 16.
김춘수 「새 두 마리」 2016.3.29.   새 두 마리  김춘수  저만치 산수유나무에 새가 두 마리앉아 있다. 어떤 사일까,자꾸자꾸 주둥이를 맞댄다.한 번씩 한쪽이주둥이를 쪼아댄다. 따끔따끔,내 눈이 어디로날을 듯 즐겁다.   김춘수 《달개비꽃》 현대문학 2004                                                                                                                2016.4.24.   이 시인의 시들은 그림 같았습니다. 그림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모두들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일이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림 같은 저 시에, 산수유인지도 모른 채, 시인이 저런 새를 보았는지도 모른 채, 사진을 붙여놓는 짓은 터무니없긴 합니.. 2016.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