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김 행 숙
신발장의 모든 구두를 꺼내 등잔처럼 강물에 띄우겠습니다
물에 젖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진 구두를 위해 슬피 울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발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그 곁에서 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었습니다
책들이 불타는 밤입니다
말들이 파도처럼 부서지고
긁어모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밤, 뜨거운 악몽처럼 이것이 나의 밤이라면 저 멀리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침 햇빛이 내 눈을 찌르는 순간에 검은 보석같이 문맹자가 되겠습니다
사로잡히지 않는 눈빛이 되겠습니다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직 이것만이 나의 아침이라면 더 깊어지는 악몽처럼 구두가 물에 가라앉고 있습니다
눈을 씻어도 내 신발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서서히 돌부리나 멧돼지가 되겠습니다
글이란 때로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시인은 때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2016 미당문학상 수상작 3편 중 한 편.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무서운 시 좀 보자고 하면 이 시를 보여주면 되겠다.
설명도 해달라고 하면 쑥스럽지만 그건 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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