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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종길 「聖誕祭」

by 답설재 2017. 6. 22.

聖 誕 祭

 

 

 

金 宗 吉

 

 

 

어두운 방 안엔

발갛게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스런1 옷자락에

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 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2 찾아볼 길 없는

聖誕祭 가까운 거리에는

이제 소리없이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 이려니.

 

 

『現代文學』 1955년 4월호 (No. 4), 『現代文學』 2017년 5월호, 154~155쪽에서 재인용.

 

 

 

 

 

 

지난봄에 작고한 시인입니다.

그 직전에 몇 편의 시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聖誕祭」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인을 추모하는 제자의 글3을 읽었고, 저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비로소 객관성을 찾았다는 건 아니고 다시 읽으며 오래전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아마 교과서에도 실렸던 저 시.

 

시작품의 비의를 정확무비하게 꿰뚫어 보는 비평가를 꼽으라면 언제나 주저 없이 선생을 든다. 옆 사람이 주눅 들 정도로 언제나 시작품이 숨기고 있는 오묘한 비밀, 그 작품을 쓴 시인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의미를 정확한 유추와 직감으로 밝혀내곤 하였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생이 지닌 유교적 가치관이나 강직함에 불편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선생이 천생적으로 현대시의 비의를 재는 저울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부러워하였다. 언젠가는 그 저울눈을 내가 차지할 날이 올지 모르다는 생각도 남몰래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 칠월 칠석이 도라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ㅎ세."라는 시4를 읽는 선생의 눈금은 정말 미세하다. 즉 "검은 암소"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불멸의 생명이요 천지의 근본인 '玄牝(현빈 : 검은 암컷)'이 원형적 이미지라고 간파하면서 견우와 직녀 전설의 신화적 맥락 속에서 견우가 먹일 소로는 소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검은 암소가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검은 암소"를 선택한 것도 시인이 의식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해석은 선생만이 지닌 탁월한 시 읽기의 한 전형이 되는 것이다. 언뜻 보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검은 암소" 한 마리가, 날카롭게 원형적 심상으로 그 실체를 해부당하자마자 이 작품의 가장 지배적인 요소로 떠오르는 것이다. 견우가 먹이는 암소가 천지창조의 모성적 심상으로 살아나 그 빛나는 검정 털을 달빛 아래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타고난 시재를 알아보고 그것을 섬세하게 분석하여 실체를 밝혀내는 선생의 녹술지 않은 시의 저울은 너무도 정확무비하여 그 크기와 섬세함을 헤아릴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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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들 '서느런'으로 기록하고 있고, 10행에도 '서느런'으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서스런'이어서 그대로 옮김.
2. '거의'가 있는 것을 오류라고 한 글도 보았으나 역시 원문에 '거의'가 있어 그대로 옮김.
3. 오탁번「봄나들이」(김종길(1926~2017) 추모 특집)『現代文學』2017년 5월호, 229~230쪽에서 옮김.

 

4. 서정주 '牽牛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