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
김 안
우리는
모든 끔찍한 일들이 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
우리가 보아야만 했던
그 모든 비극과 단순과 비참들이. 그리고
일상을 나누던 이 방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도 싸우는 이유조차도
죽이고 싶도록
죽고 싶도록
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말보다 빠르게 단죄하며 개종하며
입을 다물고선
살기 위해 조응하며
살기 위해 악마가 되어가는 우리라는 겹의 구조
용서와 망각을 강요하는 국가라는 장소와
현실의 책들이 겹쳐지듯
우리는 애초에 불행의 겹으로 태어났는지도.
홀딱 벗은 채로야만 터지는
성스러운 사랑의 괴성과 공포스러운 세속의 괴성.
그리고
방 안 가득 부풀어 오르던 정직한 살과
살에 가까운 살들이 기어이 만나는 불행의 체위.
우리가 나누었던 말과,
말이 아니었던,
말의 그물을 물고기처럼 빠져나가던 말의 잔해*들이
겹의 구조로 뒤섞이는 밤,
영혼이 살을 만나 춤을 추듯
겹으로 누워
우리 중 누군가 그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자유롭고 비참한 악마가 될 때까지.
* 존 버거, 「정복되지 않은 절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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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 등단. 시집 『오빠생각』 『미제레레』.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현대문학』2016년 10월호
‘내게도 치열했던 때가 있었지.'
'아니, 일에 빠져서 "죽더라도 이 일만 하고 나서 죽어야 하는데……" 그렇게 일에 치열할 때도 있었지, 아니 그런 때가 많았지.'
'다 한때의 치열함이겠지? 그렇다면 살 냄새 펄펄 나는 그렇게 치열할 때가 좋은 때인가?'
'나도 아직은 치열한 것일까? 어젯밤처럼 잠이 깨어 골똘히 생각하던 그런 일이 남아 있으니까, 그 일 때문에라도 내 삶은 아직은 치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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