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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서대경 「굴뚝의 기사」

by 답설재 2017. 5. 12.

굴뚝의 기사

 

 

서대경

 

 

뿌연 형광등 불빛. 머리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는 소리. 서대경 씨는 쓰던 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본다. 천장의 벽지가 갈라지더니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혹시 꼬마 놈 하나 못 봤소?」 머리가 말한다. 「꼬마 놈이라니 누구 말이오?」 「굴뚝의 기사 말이오.」 「당신은 누구요? 왜 굴뚝의 기사를 찾소?」 「옆방 사는 사람인데, 그놈이 또 내 담배를 훔쳐 갔소.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걸 보니 형씨도 그놈한테 당했나 보구려.」 「그까짓 담배 없어진 걸로 남의 방에 함부로 머리를 들이밀어도 되는 거요?」 머리가 천천히 돌면서 방 안을 살핀다. 「그러니까 정말로 못 봤소?」 서대경 씨는 말없이 머리를 노려본다. 「그럼 담배 한 개비만 얻을 수 있소?」 서대경 씨가 책상 위의 책을 집어 치켜들자 머리는 구멍 속으로 냉큼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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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지난 1월호 『현대문학』에서 발견하고 혼자서 보다가 여기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인에게나 블로그 독자들에게나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려면 블로그는 뭐 하려고 만들었나?'

 

처음에 한 번 읽고 '재미있다!' 하면서, '그런데 서대경이라니? 이게 누구지? 아무래도 나는 모르는 인물인데?' 싶었는데 다시 보니까 시인 자신이어서 좀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가지고 "서대경 씨" 어쩌고 하면서 능청을 떤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서대경, 서대경" 하는 것도 좀 우스울 것 같긴 했습니다.

 

우리에게 수채화를 가르쳐준 그 교수의 4절지 수채화 같은 시여서 그런지, 아직 철도 덜 든 동급생 여학생들과 함께 구경하던 그 수채화들이 자꾸 생각나게 합니다.

시립미술관에서 본 한 초상화 같기도 했고, 어디 갔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들었거나 어느 날 오후 이 컴퓨터에 붙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제1악장' 같기도 했습니다.

 

심심한데 내가 앉아 있는 이 방의 저 천장에서도 그 기사가 좀 나타나주면 좋겠습니다.

우선 담배라도 한 갑 마련해 두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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