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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송재학 「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마니차」

by 답설재 2017. 3. 26.

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마니차

 

 

송 재 학

 

 

경전을 읽지 않고도 경전의 냄새만으로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시큼한 정강이끼리 덧대는 사람과

눈썹이 마주치는 사람이

라마승들과 함께 밤을 꼬박 지새울 때

눈먼 이들의 눈먼 부처가 있다면

귀 먼 이들의 애먼 부처도 있다

나무라는 부처 돌이라는 부처 혹은 흙이라는 부처도

숨을 쉬었다

혓바닥에 경을 새겼던 사람과

제 몸에 본생담을 그린 사람이

물소리 바람 소리라는 잎사귀를 보았다면

나무에 새긴 나무

돌에 새긴 돌

흙으로 빚은 흙처럼

티베트 글자 장문藏文은 희로애락의 순서이다

경을 바람에 옮기거나 하늘에 올리거나

글씨를 문지르고 닦듯이

누군가 여위어가는 등짝을 내놓았다

오래되지 않은 여인의 주검도 나왔다

병을 이겨낸 보시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얼굴 생김새처럼 크고 작은 마니차가 만들어졌다

바람이 가져갈 책이다

손으로 마니차를 돌리면 경문은 손바닥에 따뜻하게 전사된다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은 앞사람이 돌리고 읽었던 경을 받고 체온까지 물려받는다

누군가 마니차를 돌리면 마니차를 거쳐간 모든 사람의 경전에 대한 기억은 같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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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기억들』 『진흙 얼굴』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검은색』.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

 

 

 

TV를 보던 아내가, 책을 보던 나에게 '자꾸'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건성으로 대답해주던 어느 순간! '어?' 하고 돌아보았다.

 

"보통사람들은 스님 손 한 번 잡는 것조차 어려운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봤자 곱게 대답해줄 리 없다.

잘 듣지 못하거나 얼른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어도 고운 대답 듣기 어려워진 주제에 책까지 읽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다.그래, 차선책으로 생각난 것이 이 시다.

 

경전을 읽지 않고도 경전의 냄새만으로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두 행을 읽고 한참 생각했었다.

― 정말 '경전을 읽지 않고도 경전의 냄새만으로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싶어 했었지.

두 행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며 좋아했었다.

― 이렇게 표현해주는 시인은 얼마나 고귀한가!

 

경전을 읽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주제에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싶어 하는 건,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그 생각이 너무나 아득하고 생각하면 그 길이 너무나 아득해서 차라리 경전을 읽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단 한 줄이라도 읽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하는 것만 달라졌다.

 

경전을 읽거나 생각이 골똘하다면 "경전의 냄새"만 맡아도 충분할 것이다.

충분했을 것이다.

단 두 줄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경전을 읽지 않고도 경전의 냄새만으로

부처를 만질 수 있을까

 

 

『현대문학』 2017년 2월호, 184~185.

 

 

 

 

 

2016.7.19. 마포

 

 

마니차 (위키백과)

마니차(摩尼車)는 주로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되는 불교 도구이다. 마니차는 원통형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겨 있다. 크기는 다양하며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는 마니차가 사원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생담(本生譚)

붓다가 전생에서 행한 선행의 기록, 즉 전생의 이야기를 본생담(本生譚, Jātaka)이라고 한다. 본생담은 당시 민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던 민화와 설화를 불교에서 채용하여 불교 설화로 완성시켜놓은 이야기이다. 기원전 2세기의 바르후트 대탑 난간에 새긴 부조나 같은 시기의 산치 대탑의 난간 부조를 비롯하여 이후 조성된 수많은 불교 조형물에는 이 본생담이 붓다의 생애를 형상화한 불전도(佛傳圖)와 함께 대상을 가득 채워 만들어졌다.(자세한 것은 정병삼 "그림으로 보는 불교 이야기"(풀빛)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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