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76 강기원 「일요일의 일기」 일요일의 일기 강기원 월요일 돈을 빼앗겼다 화요일 놀림을 당했다 수요일 교복이 찢겨졌다 목요일 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금요일 모든 것이 끝났다 토요일 드디어 해방됐다* 걱정인형을 무표정한 걱정인형을 안고 잠들었던 아이는 여섯 날의 일기를 써놓고 일요일의 일기를 쓰지 못했네 쓰지 못했네 일요일의 일기 걱정인형이 움푹 파인 눈동자 내려다보며 걱정인형이 올려다보는 천장에 목 을 맸 으 므 로 · · 일요일엔 *13살 학생의 일기 ―――――――――――――――――――――――――――――――――――――――― 강기원 1957년 서울 출생. 1997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수상. 『현대문학』 2014년 9월호, 180~181쪽.. 2015. 8. 14.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박순원 1 일제시대 태어났더라면 나는 친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친일할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을 수 없을까 아니면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은 사람한테 잘 보여 조그만 몫이라도 챙길 수 없을까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하에서 은밀히 떠도는 독립운동 독립투사 임시정부 이야기 따위야 현실감 없는 먼 나라 딴 나라 이야기로 귓등으로 흘리며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총독부에 다니는 사람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을 것이다 청요리를 먹고 싶었을.. 2015. 8. 6. 이육사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고옵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서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안동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아름다운 몽상, 육사의 "청포도"」에서). (…) 육사의 '청포도'가 '광야'와 함께 노래로 불리게 된 것은 1968년 5월 5일 안동의 낙동강 가에 육사의 시 '광야'가 시비로 세워지고 그날 저녁에 추모 공연을 시내 대안극장에서 할 때였다. 나는 그 무렵 고향 안동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문학 지.. 2015. 7. 30. 이생진 「혼자 서 있는 달개비」-그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 1 달랑 하나 남은 노란 열매가 안쓰럽습니다. 2 저 가지가 지탱하겠나 싶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바라보며 으쓱해했습니다. '나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저 나무 아래 풀숲을 뒤적이고 있었고, 아내는 좀 언짢은 표정으로 그 아주머니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나무는 열매들을 다 어떻게 했는지 저렇게 앙상한 몰골로 서 있었습니다. 여자는 버팀목까지 해둔 저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열매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날 저녁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던 열매가 한꺼번에 다 익어서 가만히 두었는데도 우수수 떨어질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탕으로 버무려 효소를 만들겠다고 하더랍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농약.. 2015. 7. 12. 정다연 「녹색광선」 녹색광선 정다연당신의 방문을 두드립니다폭설이 내리는 밤우리는 침대로 빨려 들어갑니다당신과 마주 본 적 없는내게 입 맞추어입술을 녹여주세요펄 속에 가라앉은 케르에르비 폐선처럼온몸으로 당신의 진동을 느낍니다벗겨주세요만져주세요캔버스 위 물감을 붓질하듯제멋대로인 이목구비는 전부 지우고상처 낼 수 없는 당신의 피로나를 칠해주세요한데 뒤엉키고 섞여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도록―――――――――――――――――――――――――――――――――――정다연 서울 출생. 한신대 문창과 재학 중. 그 마음 녹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합니다. 그렇다고 이 이목구비 전부 지워져 뒤엉키고 섞여 새롭게 태어나지도 못한 옛 일들이 가슴 아픕니다.어떻게 할 길이 없습.. 2015. 6. 21. 서정주 「귀촉도 歸蜀途」 歸 蜀 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ㅅ것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 부질없을 것입니다.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쓸 수 있었다면, 달랑 이 시 한 편만 썼다 해도 시인이 되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오진 못하는.. 2015. 6. 15. 「4번 타자」 4번 타자 한상순 할머니 손전화 단축번호는 아빠 1 엄마 2 언니 3 나 4 아빠 손전화엔 엄마 1 할머니 2 언니 3 나 4 엄마 손전화엔 아빠 1 언니 2 할머니 3 나 4 언니 손전화엔 할머니 1 엄마 2 아빠 3 나 4 난 언제나 변치 않는 4번 타자 ―――――――――――――――――――――――――――――――――――――――― 동시집 《병원에 온 비둘기》에서 「뻥튀기는 외로워」라는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4번 타자」를 보고 '이런 재미있는 시인이 또 있구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바로 그 시인입니다. 아빠는 혹 "내가 왜 3번이냐?"고 따지고, 엄마도 혹 "내가 2번이란 말이지?" 할 수도 있고, 할머니도 누구에겐가 2번 아니면 3번인 걸 섭섭해 하실 수도 있지만, 정작 누구에게나 4번인 이.. 2015. 5. 10. 교과서의 작품 이야기 - 옥의 티 "문우(文友)"라고 하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어서 흔히 하는 말로 "아는 사람", 그러니까 지인(知人)이 쓴 글입니다. 계간지 《교과서 연구》(79호, 2015.3.1)에 실렸습니다. 옥의 티 김 원 길(시인, 안동지례예술촌장) 내가 우리말 현대시를 처음 만난 때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갓 입학하여 며칠 안 된 봄날에 우리들은 박목월의 시를 배우며 우리 시가 지닌 율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전문) 율조가 좋은 시는 쉽게 읽히고 잘 읽히는 시는 뜻이 좀 어려워도 잘 외워진다. 실제로 이 시에서 "…… 열두 구비를 / 청노루.. 2015. 4. 14. 「폭우」 폭 우 한인준 의자와 나무가 놓여 있다 간단하게 비가 내린다 의자와 나무는 젖은 채로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문장이 눈앞에서 멈춰 있다 나는 비 내리는 문장 속으로 손을 넣는다 나무와 의자 사이를 어루만진다 손바닥 위로 빗소리만 가득해 문장 밖으로 빗방울이 튀어오른다 비가 내.. 2015. 4. 7.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동천사 1994 Ⅰ 이생진 시인의 홈페이지 이름입니다. 거기에 가보면 언제라도 이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 「저 세상」 Ⅱ 토요일 오후 3시 30분. 영풍문고가 있던 자리의 분수대 앞에서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찌감치 나섰더니 '이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2시 30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 어디 찻집에라도 들어가 시간을 보내야 할까?'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보니까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헌책방이 눈에 띄었습니다. '옳지! 저기 숨으면 되겠구나.' Ⅲ 입구에서 안쪽까지 샅샅이 훑어가기로 했습니다. ― 한 권에 1,000원 ― 한 권에 2,.. 2015. 3. 23. 「봄」 2015.3.13(금). 오전의 봄. 봄 신경림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있다 구석구석 그 소리가 닿을 적마다 우리들의 몸은 전율하고 절규하다가 드디어는 그것을 따라 통째로 밖으로 빠져.. 2015. 3. 17. 문태준 「맨발」 "문태준이 두 번째 시집 『맨발』(창비, 2004)을 출간하고 세 개의 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1990년대 이래 서정시의 영광을 절정에까지 끌어올린 2004년" 『현대문학』 2015년 1월호의 특집 《2000년대의 한국 문학》에서 본 문장입니다.* 시인으로서, 아니 그 무엇으로도 이보다 더한 평가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설명도 있었습니다. 문태준의 두 번째 시집 『맨발』에 쏟아진 호평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것이었고(2년 뒤에 세 번째 시집 『가재미』를 출간하기 전까지 그는 총 다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이 시인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당대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으로 추대되고 말았다. 시집의 표제작인 「맨발」은 일단은 시인의 부친에게 바쳐진 작품이겠지만, 넓게는 1.. 2015. 3. 6.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