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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생진 「혼자 서 있는 달개비」-그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시

by 답설재 2015. 7. 12.

 

 

 

1

 

달랑 하나 남은 노란 열매가 안쓰럽습니다.

 

 

2

 

저 가지가 지탱하겠나 싶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바라보며 으쓱해했습니다.

'나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저 나무 아래 풀숲을 뒤적이고 있었고, 아내는 좀 언짢은 표정으로 그 아주머니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나무는 열매들을 다 어떻게 했는지 저렇게 앙상한 몰골로 서 있었습니다.

 

여자는 버팀목까지 해둔 저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열매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날 저녁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던 열매가 한꺼번에 다 익어서 가만히 두었는데도 우수수 떨어질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설탕으로 버무려 효소를 만들겠다고 하더랍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농약으로 소독을 여러 번 했는데요?"

그랬더니 한 술 더 뜨더라고 했습니다. "요즘 농약 안 치는 과일이 어디 있겠어요?"

 

 

3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 걸……'

그 기회조차 놓친 것입니다. 그처럼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던 열매들 사진도 그렇고, 효소를 만들겠다던 그 여자의 얄미운 모습도 그렇습니다. 열매나 여자,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머리를 허옇게 해가지고 걸핏하면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것은 늘 좀 쑥스러웠습니다.

 

우리 동(棟)에선 만난 일이 없는, 행색도 괜찮아 뵈는, 그 '멀쩡한' 여자는, 얄밉고 불쌍한 여자입니다. 올해는 과일이 특히 풍년이어서 마트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게 몇 푼이나 한다고 죄인처럼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하기야 그런 여자들은 단돈 100원이라 하더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짓은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어서 돈이 많고 적은 것 가지고 그 사람이 불쌍한지 아닌지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돈이 많아도 그렇게 하고 다니다가 죽고 나서야 그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4

 

저렇게 달랑 한 알만 남은 꼴을 보고, 그거라도 스마트폰에 담아서 이렇게 보여주며 그 여자 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아이 같아서 한심하기도 합니다.

 

이생진 시인(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블로그 《섬으로 가는 길》에 갔다가 이런 시가 실려 있는 걸 봤습니다.

이생진 시인은 콜로라도 덴버의 블로거 '노루'님으로부터 알게 된 시인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그 얄밉고 불쌍한 여자에게도 이 시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혼자 서 있는 달개비

 

 

둘레길을 걷다가 혼자 서 있는 달개비를 봤다
외로움이 반가워
스마트폰에 담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유괴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짓을 하나 하고
네이버에 들어가 '달개비꽃'을 찾았더니
엉뚱하게 권훈칠이 나온다
그는 외로운 화가였지만……
그가 한 말이 달개비처럼 맘에 든다
'그린다는 그 자체가 나의 즐거움이다' 라는 말
그 말로 달개비를 달랬다
'피어 있다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이 말을 달개비가 좋아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달개비를 다시 봤다
아침에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2015.7.4)


권훈칠(1948-2004) : 서울대 회화과 출신으로, 대학원을 졸업하던 1976년 국전의 대상 격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이탈리아 유학 이후 외부활동을 접고 개인 작업에만 몰두해 화단에서는 잊혀진 작가였다.

 

 

5

 

'혹 모르지. 그 여자가 이번에는 아예 익지도 않은 열매까지 다 털어갈는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얼른 바로 옆의 나무 사진도 찍어 놓았습니다. 그 여자는 얄밉고도 불쌍한 여자여서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그렇다고 그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저 나무를 지키고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 여자가 언제 이 시를 보고 정신을 차릴지 알 수도 없지 않습니까?

 

 

 

노루님께 보여드리려고

http://cafe.daum.net/daum 1000에서 가져온 달개비꽃

"인터넷에서 살펴보니까 달개비꽃도 여러 가지인 것 같은데,

어릴 때 시골에서 자주 봤던 달개비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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