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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by 답설재 2015. 8. 6.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박순원

 

 

1

 

일제시대 태어났더라면 나는 친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친일할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을 수 없을까 아니면 일본 사람한테 잘 보여 한몫 잡은 사람한테 잘 보여 조그만 몫이라도 챙길 수 없을까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하에서 은밀히 떠도는 독립운동 독립투사 임시정부 이야기 따위야 현실감 없는 먼 나라 딴 나라 이야기로 귓등으로 흘리며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총독부에 다니는 사람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을 것이다 청요리를 먹고 싶었을 것이다 신사참배하러 가는 긴 줄 속에 있었을 것이다

 

 

2

 

여기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는 한밤중에

카드를 긋는다 내리긋는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바람 소리는 불변할 것이다

한밤중에 나는 카드를 긋고

찌릭찌릭 혓바닥처럼 올라오는

계산서에 날아갈 듯 사인을 하고

마지막 장을 떼어 꼬깃꼬깃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택시를

잡아탄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나는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가 다른 택시로 갈아타고

청주로 간다 통행료 만 원은

현찰로 내고 택시비 십이만 원은

또 카드로 긋는다 별일

없을 것이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이 정도쯤이야 음냐음냐

한동안만 죽은 듯이 살면

대한 사람 대한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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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원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2005년 『서정시학』 등단.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 『주먹이 운다』 『그런데 그런데』.

 

 

『현대문학』 2015년 6월호, 164~165쪽에서.

 

 

 

 

 

 

구차하게 살면서도 이런 일 저런 일, 옳지 못한 듯한 경우를 만나면 분개하기도 합니다.

 

각각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며 전체를 이루는 이 복잡다단한 나라가 불쌍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갈갈이 찢겨 있는데도 더 찢어지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여기 차 세워도 되죠?"

"안 되는데요?"

"왜 안 돼!"(혹은 "어떤 놈이 그렇게 정했지?" "뭐 이따위 법이 있어!" "내 더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