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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최찬상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설명이 필요없다"는 말이 있다. 지난 2일 저녁, 신문에서 이 시를 보며 그 말을 실감하는 느낌이었다. ♬ 이렇게 세 줄로 붙여 쓸 수도 있다.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또 이렇게 다 붙여 놓을 수도 있다.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 2014. 1. 16.
「치유」 치 유 김선영 이즈러진 달 후후 불어서 풍선이 됩니다 만월입니다 입술 꼭 다문 목련 후후 불어서 꽃잎 벌립니다 목련이 순백의 버선발로 비취의 하늘을 뛰어 다닙니다 굳은 영혼에서 연두를 뽑아 올리는 봄 사람들이 놓고 간 이별의 상처도 봄바람이 만지고 해결합니다 이즈러진 봄은 .. 2014. 1. 14.
김원길 「마법」 시든 소설이든, 수필, 희곡, 평론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업적, 사상 등을 알아보는 까닭이 있습니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석사학위나 박사학위 논문, 혹은 저널에 실을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평론을 쓰려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어쨌든 작가를 알면 작품을 더 재미있게, 깊이 있게,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46년 전, 지금의 저 안동 지례예술촌장 김원길 시인은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 선생이었습니다. 내가 그 교육대학의 예술제를 만들고 그 프로그램 속에 "문학의 밤" 행사와 "시화전"도 넣겠다고 하자, 대뜸 두 가지 행사에 다 참여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어느 안개낀 가을날 밤, 이 시 「마법」도 감상한 것 같은데.. 2014. 1. 7.
김신용 「자라─외편」 자 라 ─외편 김신용 연못이 반짝, 눈을 뜬다 자라 한 마리가 물의 부력에 전신을 맡긴 채, 떠오른다 꼭 물의 눈 같다 수면 아래, 감은 물의 눈꺼풀 속에 깊숙이 잠겨 있다가 고요한 한낮, 물의 눈꺼풀을 열며 떠오르는 것 1, 2, 3, 4…… 마치 파문처럼 번져나가는 무수한 숫자들의 고리를 끊고 마지막 0이 하나 만들어지는 것 0이 만들어져, 그 숫자들을 물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 그리고 그 0에서 숫자 1만을 꺼내, 발을 저어 다시 가만히 물 아래로 잠기어가는, 저 물의 눈망울 잠깐 동안 저 물의 눈에 비친 것이 선한 구름이었으면 좋겠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 김신용 1.. 2014. 1. 2.
박두진 「하얀 눈과 마을과」 경기도 남양주시 홍보지 Ⅰ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저런 그림을 보면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듭니다. 정작 집 모양이나 자작나무 숲이 우리 것 같지 않은데도 저 하늘과 마을길, 냇가 등의 분위기에서 그동안 흔히 봤던 마을들을 떠올립니다. 방학을 맞은 마을도 떠오릅니다. 눈이 쌓인 날의 산골은 딴 세상인 듯 조용했습니다. 길을 나서기도 어려웠고, 굳이 나설 일도 없어서 마음도 편했습니다. 1950년대의 초등학교 국어책에서였는지, 교사가 되어서 가르친 국어책에서였는지, 눈이 쌓인 산골의 초갓집 단칸방에서 누가 뭘 하는지 밤 늦도록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시와 그 아래로 비켜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도 생각납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시, 밤 늦.. 2013. 12. 8.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재작년 2월 둘째 주 어느 날, 블로그 『강변 이야기』의 작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릉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徐廷柱詩選』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974, 111. 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김원길 저 눈 좀 보아, 저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좀 보아 얼어 붙은 나룻가의 눈 쓴 소나무와 높이 솟은 미루나무 늘어선 길을 눈 속에 가고 있는 여잘 좀 보아. 내리는 눈발 속에 소복(素服)한 여인의 뺨이 보이네.. 2013. 12. 1.
문성해 「삼송 시인」 삼송 시인    문성해  지하철을 타고 삼송을 지나면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내가 읽는 시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요즘 뭐 재미난 시집이 있냐고이제 그곳에선 시 같은 건 안 써도 된다고아직도 절구 같은 것이나 붙잡고 사는 나를안됐다는 듯 본다그곳의 긴 터널 같은 시간 속에서시인은 시도 안 쓰고 뭐 하고 사나 궁금하고(시 쓰는 귀신은 없는지 궁금하고)난 죽으면 칠흑 같은 흉몽을 깁고 깁는 재단사나 되고 싶고귀신들끼리 짝 찾아주는 듀오* 같은 일도 괜찮다 싶고, 삼송을 지나면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주머니에서 복숭아 하나를 내밀며시 쓰는 일을 복숭아 베 먹듯 한번 해보라 한다(다디단 과육보다 과즙이 오래간다 귀띔해준다)나는 시인이 죽으면 가는 곳이 궁금해지고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이승에 두고 온 시를그곳에서도 야.. 2013. 11. 29.
「2호선」 그리고 「교대역에서」 2호선 이시영 가난한 사람들이 머리에 가득 쌓인 눈발을 털며 오르는 지하철 2호선은 젖은 어깨들로 늘 붐비다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신대방 대림 신도림 문래 다시 한 바퀴 내부순환선을 돌아 사당 낙성대 봉천 신림 가난한 사람들이 식식거리며 콧김을 뿜으며 내리는 지하철 2호선은 .. 2013. 11. 11.
최승호 「홀로그램 반딧불이 축제」 홀로그램 반딧불이 축제 최승호 홀로그램 반딧불이 축제를 구경 나온 어떤 스님은 반디佛 반디佛이다! 어린애처럼 반가워하고 사방에서 어지럽게 날아오르는 반딧불에 둘러싸여 어떤 수녀님들은 개똥벌레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수줍은 소녀들처럼 속삭인다면…… ―――――――――――――――――――― 최승호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7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고비』 『아메바』 등. 등 수상. Ⅰ 꼭 30년 전입니다. 타이완 까오슝의 무슨 방갈로 같은 곳에서 하룻밤 지내게 되었는데, 반딧불이가 아주 수없이 많이 날아다녀서 잠깐 우리들 일행을 환영하는 행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2013. 11. 5.
「저 빨간 곶」 저 빨간 곶 문인수 친정 곳 통영 유자도에 에구구 홀로 산다. 나는 이제 그만 떠나야 하고 엄마는 오늘도 무릎 짚고 무릎 짚어 허리 버티는 독보다. 그렇게 끝끝내 삽짝까지 걸어 나온, 오랜 삽짝이다. 거기 못 박히려는 듯 한 번 곧게 몸 일으켰다, 곧 다시 꼬부라져 어서 가라고 가라고 배 뜰 시간 다 됐다고 손 흔들고 손 흔든다. 조그만 만灣이 여러 구비, 새삼 여러 구비 깊이 파고들어 또 돌아본 즉 곶串에, 저 옛집에 걸린 바다가 지금 더 많이 부푼다. 뜰엔 해당화가 참 예뻤다. 어서 가라고 가라고 내 눈에서 번지는 저녁노을, 빨간 슬레이트 지붕이 섬을 다 물들인다. ―――――――――――――――――――――――――――――― 문인수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 등단. 시집 『뿔』 『홰치.. 2013. 10. 10.
「아침을 닮은 아침」 아침을 닮은 아침 박연준 지하철 환승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 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 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 없이 서 있는 자 모두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환승을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는 소리를 빼앗긴 비처럼 비였던 비처럼 빗금으로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기다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지금을 잊은 게 아닐까 우리의 걸음엔 부러진 발목과 진실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한 마디쯤 멀리 선 귀신을 뒤로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눈먼 귀신들 오늘 아침엔 아무도 서로를 못 본 채 모두가 귀신이 되어 사라졌다 ―――――――――――――――――――――――――――――― 박연준 198.. 2013. 9. 26.
김원길 「상모재」 교육대학을 다닐 땐 곤궁하고, 재미도 없고, 걸핏하면 쓸쓸해서 그 2년이 참 길었습니다.그나마 당시 안동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 선생 김원길 시인을 만나는 날에는 제법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원길 시인이 『월간문학』(「취운정 마담에게」, 『시문학』(「꽃그늘에서」 등)으로 등단하고, 고향 지례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자 선대 유산인 고건축물 10동을 마을 뒷산으로 옮겨 지어 문예창작마을 을 운영하고 있다는 등 그간의 동정은 간간히 들었지만, 모른 척 지냈는데, 얼마 전에, 그러니까 45년만에 덜컥 연락을 해왔습니다."만나러 가겠다!" 그 시인이 「상모재」라는 시가 들어 있는 글 「상모재」를 보내주며 심심하거든 한번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심심하거든……      상모재                    .. 2013.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