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76 김혜순 「눈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김 혜 순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집어 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가 방을 대물렌즈 위에 올려놓는다. 내 방보다 큰 눈이 나를 내려다본다. 대안렌즈로 보면 만화경 속 같을까. 그가 방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훅훅 불어보기도 한다. 그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터뜨려지기 쉬운 방이 마구 흔들린다.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박이는 하늘이 다가든 것만 같다. 그가 렌즈의 배수를 올린다. 난파선 같은 방 속에 얼음처럼 찬 태양이 떠오르려는 것처럼,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장롱 밑에 떼지어 숨겨놓은 알들을 들킨다. 해초.. 2013. 9. 5. 서대경 「천사」 천 사 서대경 성탄절 밤이었다. 그녀는 빈방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 그녀의 방 창문을 가만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이상하도록 친근하고 포근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자신의 방이 아파트 12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창을 열자 얼음 무더기가 쏟아지듯이 눈부신 냉기를 뿜으며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그의 몸에서 어두운 눈보라의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인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내 곁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그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경련하듯 떨고 있는 그의 앙상한.. 2013. 7. 15.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 정현종 옮김, 문학동네, 2013 왜 거대한 비행기들은 자기네 아이들과 함께 날아다니지 않지? (시 1의 4연 중 1연) 사람들이 네루다처럼 "왜 거대한 비행기들은 / 자기네 아이들과 함께 날아다니지 않지?"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면 좋을 것이다. 전에『현대문학』에 연재될 때 눈여겨 본 시도 있다.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그게 가버렸다면, 그것들은 어디로 갔지? (22의 4연 중 1연) 누구한테 물어볼 수 있지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왔는지? (31의 4연 중 1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44의 5연 중 1연) ♬ 난해한 시, 해설을 읽어보면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시, '아, 시는 어려운 게.. 2013. 6. 2. 강성은 「커튼콜」 커튼콜 강성은 한밤중 맨홀에 빠진 피에로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오늘 공연은 만석이었는데 어째서 지금 이 구덩이 속에 있는가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분장을 지운 피에로 분장을 지워도 피에로 공중의 달에게 익살맞게 인사합니다 달님이여 그대는 지금 내 유일한 관객 밤새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거요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비좁은 구덩이 속에서 하염없이 공중만 보고 있다 삼십 년 동안 갈고 닦은 만담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구덩이 속에서 지난 세월을 헤집어보지만 떠오르는 건 무대 뒤에서 혼자 분장을 지우던 날들뿐 여긴 말라버린 우물인가 고래 뱃속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가 달은 뿌연 커튼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빗방울은 조금씩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군가의 .. 2013. 5. 28. 천양희 「단 두 줄」 단 두 줄 천양희 전쟁 중에 군인인 남편을 따라 사막에서 살던 딸이 모래바람과 사십 도가 넘는 뜨거운 사막을 견디지 못해 아버지한테 편지를 썼다 죽을 것 같으니 이혼을 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겠다 이런 곳보다는 차라리 감옥이 낫겠다는 편지였다 딸의 편지를 받아 본 아버지의 답장은 단 두 줄이었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흙탕물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아버지의 단 두 줄은 훗날 딸이 작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단 두 줄의 편지를 소재로 「빛나는 성벽」이란 긴 소설을 썼다 작가가 된 뒤 어느 인터뷰에서 딸이 한 말도 단 두 줄이었다 "나는 자신이 만든 감옥의 창을 통해 별을 찾을 수 있었다" ─────────────── 천양희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 등.. 2013. 5. 15. 이양연 「야설(野雪)」 이 이야기는 야한 이야기, 굳이 한자로 쓴다면 '野說'이 아니고, '눈 내린 들판' 혹은 '저 들의 눈'이라고 해도 좋을 野雪이므로 '野說'을 찾아오신 분은 '바로' 돌아가시는 것이 낫습니다. 야설(野雪) 교장자격연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1999년 5월, 17일부터 1주일간은 LG인화원에서, 이후 한 달은 한국교원대학교 종합교원연수원에서 지냈습니다. 교육부에서 근무할 때여서 불철주야 일에 매달려 지내다가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주입식 강의나 들어야 하는 당시의 교원대 연수원에서는 참으로 무료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유를 막론하고 교수나 학자, 교사들의 일방적 강의로 점철되는 연수를 혐오하고 경멸합니다. 만약 교사를 양성해 내는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강의도 그런 식이라면 우리 교육은 요원하다고 단언하겠습니다... 2013. 5. 1. 오탁번 「작은어머니」 작은어머니 푸새한 무명 뙤약볕에 말려서 푸푸푸 물 뿜는 작은어머니의 이마 위로 고운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보리저녁이 되면 어미젖 보채는 하릅송아지처럼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안질이 나서 눈곱이 심할 때 작은어머니가 솨솨솨 요강 소리 그냥 묻은 당신의 오줌을 발라주면 내 눈은 이내 또록또록해졌다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작은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잤다 회임 한 번 못한 채 젊어 홀로 된 작은어머니의 예쁜 젖가슴은 가위눌림에 정말 잘 듣는 싹싹한 약이 되었다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 22쪽 오탁번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시인의 시에는 스토리텔링이 들어 있어서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읽기가 어려운 시도 많습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시인이 애써서 지은 시니까……'.. 2013. 4. 27. 심창만 「맑은 날」 심창만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한국도서관협회 2012 우수문학도서 푸른사상 2012 맑은 날 마당에 병든 누에를 내던졌다 죽기도 전에 새들이 날아와 물고 갔다 누님은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업고 빨래를 널었다 하염없이 빛나던 누님의 목덜미 창백한 우물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더 가벼워지면 나는 어디에 던져질까 마당가에 내던져진, 허물허물해지거나 누렇게 병든 누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나는 그걸 못 본 체했습니다. 끔찍했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데 지금은 모면한 것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얼른 고개를 들어 햇빛이 쨍쨍한 맑은 하늘 저 편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 누에들은 개미떼에게 속절없이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버려져야 할 것은 맑은 날.. 2013. 4. 20. 백석 「쓸쓸한길」 쓸쓸한길 거적장사하나 山뒤ㅅ녚비탈을올은다아 ── 딸으는사람도없시 쓸쓸한 쓸쓸한길이다山가마귀만 울며날고도적개ㄴ가 개하나 어정어정따러간다아스라치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복이 서러웁다뚜물같이흐린날 東風이설렌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1판16쇄), 207쪽. 백석白石본명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오산고보와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고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했다. 해방 후 고향에 머물다 1995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 위의 책 날개에서 * 낱말풀이(이 시집 49) 거적장사 시신을 거적으로 대충 말.. 2013. 4. 6. 이근배 「신라토기 벼루에 대한 생각」 신라토기 벼루에 대한 생각 이근배 내가 벼루에 홀려 있는 것을 아는 고미술상 주인 김 씨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이라며 신라토기 벼루를 선물로 주었다 웬 UFO? 한 뼘 지름의 둥근 맷돌 모양에 연면硯面을 가운데 앉히고 해자처럼 연지가 싸고도는 생김이 내 눈에 비행접시로 뵈는 거라 천 년 너머에도 우주인이 오갔던가 이 타임머신에 올라타본다 혹시 원효, 솔거, 김생, 최치원……, 그런 대문장이거나 신필들이 먹을 갈던 벼루? 돌처럼 구워진 흙에 아직도 숨 쉬는 먹내음 코를 벌름거리며 뺨도 대보고 손으로 문질러보는 느낌이 알싸하다 인연이 삼국유사를 썼던가 절과 절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과 탑이 기러기떼 나는 듯했던 저 계림鷄林을 높이 들어 올린 신라대의 공부가 넓고 크신 이들의 붓의 신령이 스며 .. 2013. 3. 18. 안규철 「실패하지 않는 일」 실패하지 않는 일 우리가 하는 일은 대체로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금연에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원고마감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예술가로서 성공하고 정작 예술에서는 실패한다. 일에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은 거기 도달하느냐 못하느냐의 두 가지뿐이다. 가혹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사태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그 반대쪽에는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이다. 만약 성공과 실패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 우리는 목표를 버리고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인생을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으로 채워간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제외하고 다른 목표들을 버리는 것이다. 50대 후반에 들어선 나의 옛 친구들은 이제 상당수가 이런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 2013. 3. 11. 고운기 「코피」 코피 고운기 여자가 오줌을 누되 꼭 이렇게 싸란답니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 한번 퍼지르면 온 동네가 잠길 정도 물론 이것은 꿈속의 이야기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할머니는 진의인데 언니가 꾼, 온 동네 잠기는 오줌 꿈을 샀다는군요 여기까지 듣다 보니 어라, 이건 김유신 동생 보희와 문희 이야기 아닌가 생각하실 분 많으시겠으나 그것은 삼국유사에 실렸고 이것은 고려사에 나오는데 꿈 판 다음 날 귀한 손님 맞으라는 아버지 말씀에 언니는 문지방을 넘다 발이 걸려 넘어져 코피가 주루룩 얘야 재수 없다 동생 들여보내라 이 대목이 아주 다르지요 언니는 가장 운 나쁜 여자 언니는 하필 거기서 넘어지고 하필 코가 깨져 피를 흘렸단 말입니까 크건 작건 제 것이어서 제 복 담긴 꿈이라면 팔지 마시라고 또 한 번 심심한 옛날.. 2013. 2. 28.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