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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강성은 「커튼콜」

by 답설재 2013. 5. 28.

커튼콜

  

 

                                                                     강성은

  

 

한밤중 맨홀에 빠진 피에로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오늘 공연은 만석이었는데

어째서 지금 이 구덩이 속에 있는가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분장을 지운 피에로

분장을 지워도 피에로

공중의 달에게 익살맞게 인사합니다

달님이여 그대는 지금 내 유일한 관객

밤새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거요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비좁은 구덩이 속에서 하염없이 공중만 보고 있다

삼십 년 동안 갈고 닦은 만담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구덩이 속에서 지난 세월을 헤집어보지만

떠오르는 건 무대 뒤에서 혼자 분장을 지우던 날들뿐

 

여긴 말라버린 우물인가 고래 뱃속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가

달은 뿌연 커튼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빗방울은 조금씩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군가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그리고 삼십 년 동안 들었던 모든 웃음소리들이

한꺼번에 그의 귀를 찍을 듯 터져 나왔다

그는 귀를 막고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제 그만들 좀 하라고

 

죽을힘을 다해 구덩이를 기어오른다

미끄러졌다 오르기를 반복하는

그는 지금 분장을 지운 피에로

분장을 지워도 피에로

구덩이 속에 있는 자

 

 

 

 

────────────────────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조용하다. 자주 적막하다. 다들 어디 갔을까?

 

세상은 본래 이렇게 조용한 곳인가 싶기도 하고, 본래는 떠들썩한 곳인데 내가 그 '떠들썩한 세상'을 떠나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신문이나 방송을 봐! 하루하루가 얼마나 복잡하고 떠들썩한지……' 

그러다가 '세상은 본래 이렇게 조용한 곳'이라는 느낌일 때는, 내가 '그 떠들썩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의 그 어린 시절에 본 세상 역시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는 회상에 젖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세상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는 증거를 이것저것 모아보며 시간을 보낸다.

 

 

 

 

지금 이 적막이 세상의 모습이라면 나는 약 40년 아니면 50년을 살다가 떠나온 그 세상에서 분장을 하고 배우처럼 지낸 것이다. 싫든 좋든 어처구니없이 분주하고 때로는 번잡하고 때로는 따분하게 지낸 일들을 생각해보면――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생활을 하던 일을 떠올리면――그곳의 나는 피에로였던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한때 피에로였다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와서 어떻게 할 도리도 없고 그걸 알아서 안타까워해서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터무니없을 정도로 조용하다고 느끼는 이 세상의 내가 바로 피에로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좀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 세상이나 내가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세상(그러니까 2010년 2월경까지의 그 세상) 그 두 가지 세상 중 어느 한 곳은 내가 피에로로서의 역할을 맡은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와 있는 세상에서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명의 피에로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내가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있는가. 앞으로의 일이라고 해서 뭘 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현대문학』 2012년 10월호,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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