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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오탁번 「작은어머니」

by 답설재 2013. 4. 27.

 

 

작은어머니

 

 

푸새한 무명 뙤약볕에 말려서

푸푸푸 물 뿜는

작은어머니의 이마 위로

고운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보리저녁이 되면

어미젖 보채는 하릅송아지처럼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안질이 나서 눈곱이 심할 때

작은어머니가

솨솨솨 요강 소리 그냥 묻은

당신의 오줌을 발라주면

내 눈은 이내 또록또록해졌다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작은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잤다

회임 한 번 못한 채 젊어 홀로 된

작은어머니의 예쁜 젖가슴은

가위눌림에 정말 잘 듣는

싹싹한 약이 되었다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 22쪽

 

 

 

오탁번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시인의 시에는 스토리텔링이 들어 있어서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읽기가 어려운 시도 많습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시인이 애써서 지은 시니까……' 하고 읽으려 해도 하도 재미가 없어서 그 짧은 시 한 편을 다 읽지 못합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몸은 말을 잘 듣지 않고 읽고 싶은 시집은 자꾸 늘어나게 되자 이런 경우에는 포기하자는 생각을 하고 맙니다.

'그래, 때로는 포기하자. 지금까지 애써서 읽으려 해도 안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런 시들이 잘 이해되기 시작한다면 내게 무슨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겠지. 이제와서 그 기적이 일어날 리는 없겠지.'

 

그 시인이 들으면 '재미 없으면 그만두지, 누가 애써 읽으라고 강요하나?' 하겠지만, 어쨌든 너무나 재미가 없고, 하도 재미없는 시가 많아서 한번 읽어서 느낌이 와 닿으면 재미있구나 싶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단어 하나하나는 전혀 난해하지 않은데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아서 '내가 시인이 될 수는 없었지. 그렇지만 평생 시를 잘 읽는 독자는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어쩌다가 읽히지 않는 시를 이렇게 많이 만나게 되었을까?' 때로는 자책까지 하다가 시인들끼리도 다음과 같은 논의를 하는 걸 보면 고소하기도 하고, 문득 어렵거나 재미없는 시가 많다고 느끼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일게 됩니다.

 

우리 시인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자기만 아는 노래와 비명과 장난, 자기만의 방언으로밖에는 진정성을 드러낼 수 없는 고독에 처하게 되었나. 독자 따위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을 만큼 그들의 비명이 고통에 충실하기 때문인가.

 

              - 김사인 「자신과 타자의 운명을 일치시키려는 애씀」(제58회 현대문학상 심사평) 에서

 

 

 

시인들의 이와 같은 자책 혹은 꾸지람(그럼에도 그런 시를 쓰는 시인들은 말도 아닌 평가라고 할지도 모르지만)은 드문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현대문학상 심사평에서는 거의 매번 발견하게 되는 지적입니다.

 

모처럼 유명한 시인의 지적을 인용했으니까 고상한 질문은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빈정거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런 시를 쓰면 감동 받았다고 하는 이가 있는지, 아니면 감동 같은 건 다 쓸데없는 짓거리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시에 아주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게 되면 그런 시에 감동받게 된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럼, 언제 누가 그 시를 읽게 되는지, 아니면 누가 읽고 안 읽고는 다 쓸데없는 일이라는 뜻인지……"

하기야, 그런 시인이 이 글을 읽을 리도 없으니 더 빈정거려봤자 소용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하던 얘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저 오탁번 시인의 시는, 시집 『눈 내리는 마을』은, 한 시간 만에 다 읽어도 되고 두어 시간 걸려서 읽을 수도 있고 야금야금 읽어도 되는 시들입니다. 말하자면 시인의 추억, 시인의 사랑, 시인이 본 세상 사람들의 사랑 얘기를 옛날 얘기하듯 들려줍니다. 그 옛날 얘기들 듣듯 재미가 좋은 시들입니다. 어떤 시는 아주 그 뭐랄까 아주 쪼끔 민망하고 '그런' 육담이 아주 쬐끔 동원되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은 얼마나 정겹고 익살맞은 혹은 눈물겨운 우리들 서러운 사랑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둘러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굴비」의 3연 중 제1연. 이 시집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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