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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심창만 「맑은 날」

by 답설재 2013. 4. 20.

 

 

 

 

 

심창만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한국도서관협회 2012 우수문학도서

푸른사상 2012

 

 

 

맑은 날

 

 

마당에 병든 누에를 내던졌다

죽기도 전에 새들이 날아와 물고 갔다

누님은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업고 빨래를 널었다

하염없이 빛나던 누님의 목덜미

창백한 우물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더 가벼워지면 나는

어디에 던져질까

 

 

마당가에 내던져진, 허물허물해지거나 누렇게 병든 누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나는 그걸 못 본 체했습니다. 끔찍했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데 지금은 모면한 것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얼른 고개를 들어 햇빛이 쨍쨍한 맑은 하늘 저 편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 누에들은 개미떼에게 속절없이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버려져야 할 것은 맑은 날에도 내던져진다는 것도 새로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 더 가벼워지면 나는 / 어디에 던져질까

 

목숨이 다하지도 않았는데도 버려져 새들에게 물려간, 개미떼에게 끌려가며 죽어간 것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업고 빨래를 널던,

목덜미가 하염없이 빛나던 누님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창백한 우물이 소리 없이 흔들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심창만 시인의 시는 오래 남아 있어 줄 것 같았습니다.

 

 

  ──────────

심창만 沈昌萬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1988년 『시문학』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뒤 1997년 계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인들은 인사말도 시처럼 쓰는데, 이 시인은 딱 한마디 "시를 쓰게 한 모든 인연에 감사한다"고만 썼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그 '인연'이라는 걸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맑은 날」은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의 맨 처음에 실려 있습니다.

한 편 한 편 읽고 싶어서 오늘은 우선 딱 몇 편만 읽었습니다.

2011년 7월 26일, 『現代文學』 2010년 11월호에 실린 「군산 서해방송」을 이 블로그에 실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시인입니다.

시인이 건강하게 지내면서 좋은 시를 많이 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