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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근배 「신라토기 벼루에 대한 생각」

by 답설재 2013. 3. 18.

신라토기 벼루에 대한 생각

 

 

                                                         이근배

 

 

내가 벼루에 홀려 있는 것을 아는

고미술상 주인 김 씨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이라며

신라토기 벼루를 선물로 주었다

웬 UFO?

한 뼘 지름의 둥근 맷돌 모양에

연면硯面을 가운데 앉히고

해자처럼 연지가 싸고도는 생김이

내 눈에 비행접시로 뵈는 거라

천 년 너머에도 우주인이 오갔던가

이 타임머신에 올라타본다

혹시 원효, 솔거, 김생, 최치원……, 그런

대문장이거나 신필들이 먹을 갈던 벼루?

돌처럼 구워진 흙에 아직도 숨 쉬는 먹내음

코를 벌름거리며 뺨도 대보고

손으로 문질러보는 느낌이 알싸하다

인연이 삼국유사를 썼던가

절과 절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과 탑이 기러기떼 나는 듯했던

저 계림鷄林을 높이 들어 올린 신라대의

공부가 넓고 크신 이들의

붓의 신령이 스며 있는 것일까?

내 무딘 손끝에 핏발을 세워주는

 

 

 

* 경주의 옛 이름

 

 

 

────────────────

이근배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등 각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 시조, 동시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노래여 노래여』 『한강』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종소리는 끝없이 새벽을 깨운다』 등.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12년 11월호, 220~221쪽.

 

 

 

 

 

한번은 사회과를 연구하는 교사들이 모여 대학 박물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제대로 알아야 잘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그 날 그 관장은 우리 교사들을 이끌고 다니며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관장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는 한 질그릇 앞에 섰다.

"이 질그릇은 어떻습니까. 우리 대학 박물관의 여러 가지 유물 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인데요."

 

그러고 보니 '저런 걸 다 진열해 놓았나?' 싶었던 그것이 여느 질그릇과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질그릇은 신라 때 어느 선비가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멀리서 한 친구가 그 선비를 자주 찾아왔지요. 그러면 그 선비는 산골짜기 옹달샘에 달이 비칠 때, 이 그릇으로 그 달을 떠서 차를 끓이고 친구를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나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라 그 자리를 떠나기가 싫을 지경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그릇이군요!"

그러자 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제야 나도 빙그레 웃었지만, 사실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때 나는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모두 그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스며있기 마련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 졸저, 『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아침나라, 200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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