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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고운기 「코피」

by 답설재 2013. 2. 28.

코피

 

 

고운기

 

 

여자가 오줌을 누되

꼭 이렇게 싸란답니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

한번 퍼지르면 온 동네가 잠길 정도

 

물론 이것은 꿈속의 이야기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할머니는 진의인데

언니가 꾼, 온 동네 잠기는 오줌 꿈을 샀다는군요

 

여기까지 듣다 보니

어라, 이건 김유신 동생 보희와 문희 이야기 아닌가

생각하실 분 많으시겠으나

그것은 삼국유사에 실렸고 이것은 고려사에 나오는데

 

꿈 판 다음 날

귀한 손님 맞으라는 아버지 말씀에

언니는 문지방을 넘다 발이 걸려 넘어져 코피가 주루룩

얘야 재수 없다 동생 들여보내라

이 대목이 아주 다르지요

 

언니는 가장 운 나쁜 여자

언니는 하필 거기서 넘어지고

하필 코가 깨져 피를 흘렸단 말입니까

 

크건 작건 제 것이어서 제 복 담긴 꿈이라면 팔지 마시라고

또 한 번 심심한 옛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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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 1961년 전남 보성 출생. 1983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섬강 그늘』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등.

 

 

 

 

 

 

『현대문학』 2012년 10월호, 166~167쪽.

 

역사(歷史)를 詩로 바꾸는 매직쇼를 봅니다. 그런 변화가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삼국유사』 속의 이야기들은 물론이지만, 굳이 '정사(正史)'라고 구분하여 가르치는 『삼국사기』의 내용들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의 그 장군들 이야기는 서사시로 그려진, 저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장군들 얘기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역사를 만드는 이들 중에는 너무나 혐오스럽고, 각박하고, 촌스럽고, 한심하고, 심지어 웃기고, 어쨌든 상대도 하기 싫은 이가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만드는 역사도 종내 시가 되려나?'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부디 그들도 이 시 「코피」를 읽고 그걸 알아채면 좋으련만……

 

 

 ♬

 

 

멋지게 펼쳐진 구릉이 온통 복사꽃 세상인데, 구릉 위 정자(亭子)에서 그 구름밭 같은 복사꽃 세상을 한가로이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의 그 꿈이 태몽(胎夢)인 걸 나중에 알아차렸습니다.

 

그 애는 지금 영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나도 말을 건네기도 어렵고, 하는 짓도 서로 다른 사위 녀석이, 영국인이기 때문입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사는 것이 외로울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그리 즐거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 그 봄꿈처럼 화사한 일생이면 좋을 텐데 지구 저 반대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꿈의 해석』에 의한다면 이런 꿈은 어떻게 해석되겠습니까? 꿈 중에는 그렇게 되었으면 싶은 것도 있고, 그런 꿈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본래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더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애와 나의 인연, 그 애와 나의 삶도, 훗날, 아주 작은, 말하자면 호리(毫釐) 같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는 하겠습니까?

 

 

 

 

「코피」…………

따질 것도 없이, 참 좋은 시여서 몇 번을 읽었습니다.

역시 시인은 꼭 있어야 하겠고, 온 나라 사람들이 시인들을 더 존중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얄팍한 시를 써서 시가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마구 흔들어 놓고 그걸 가지고 큰소리치는 사이비까지 포함하자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