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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서대경「천사」

by 답설재 2013. 7. 15.

천  사
 


서대경
 
 
성탄절 밤이었다. 그녀는 빈방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 그녀의 방 창문을 가만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이상하도록 친근하고 포근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자신의 방이 아파트 12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창을 열자 얼음 무더기가 쏟아지듯이 눈부신 냉기를 뿜으며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그의 몸에서 어두운 눈보라의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인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내 곁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그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경련하듯 떨고 있는 그의 앙상한 등에 돋은 창백한 한 쌍의 날개를 내려다보았다.
커피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유리창으로 간간이 눈가루가 부딪혔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없이 고요하고 깊은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담배 가진 거 있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그가 말했다. 그는 창턱에 걸터앉아 아이처럼 다리를 흔들었다. "걱정할 거 없어. 너는 곧 나를 잊게 될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름다운 잿빛 눈으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너는 날 처음 보았다고 생각해? 아니야. 넌 수없이 나와 마주쳤지.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모두 잊었지. 네가 꾼 수많은 꿈처럼 지금 이 순간의 기억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묘한 서글픔을 느꼈다. "왜 나를 찾아왔나요?" 그는 창을 열고 한 손으로 창틀을 붙잡은 채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1년 전에도 넌 똑같이 물었었지. 내가 떠나고 나면 넌 곧 잠에 빠져들 거야. 인간들은 그렇더라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는 거야." 그의 등 뒤로 어둡게 날개가 펼쳐졌다. 그의 눈에 잠시 쓸쓸함이 스쳐 갔다. "그러니까 그게 네 잘못은 아니지. 그리고 오늘은 성탄절이니까." 그는 그녀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고, 다음 순간 허공으로 몸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창으로 다가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왜 나를 찾아왔어요!" 전신주 불빛이 깔린 길 위로 눈가루가 연기처럼 고요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잿빛의 장막이 서서히 자신의 의식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잠들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얼굴을 한껏 내밀었다. 뺨에 부딪는 차디찬 밤의 속삭임. 그녀는 눈을 감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존재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책상을 더듬어 백지를 펼치고 펜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전에도 지금과 같은 순간을 겪은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찾아왔다. 그녀는 쓸쓸히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심연처럼 도사린 어떤 아득하고 눈부시게 타오르는 존재의 눈을 마주 보았다.

 

 


  ―――――――――――――――――――――
서대경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현대문학』 2013년 1월호에서 보았습니다.

한참 읽다가 '천사 얘기구나!' 하고 제목을 확인했습니다. '봐, 천사 얘기지.'

 

'천사는 이렇게 올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오는 것이겠구나.'

'사람들은 너나없이 천사가 오기를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도 있겠구나.'

'이 방법이, 천사가 우리 곁에 왔다가 가는 방법치고 그리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면, 그럼 다른 평범한 방법도 많고, 무수한 천사들이 수두룩하게 오고 가는데, 우리는 바빠서, 무심해서, 딴 데 신경 쓰느라고, 때로는 알아보지 못하고, 뻔히 보고도 잊어버리고 그러는 거겠구나'.

 

그렇다면, 언젠가 어느 천사 하나가 가까이 오면, 한번 꽉 잡고 늘어져보는 것도 괜찮은 수작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인이 만난 천사는 "걱정할 것 없어. 너는 곧 나를 잊게 될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했지만,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우리는 결국 천사를 만났다는 사실을 잊게 되고, 잊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라는 그 말을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천사를 만난 사람들 중에 누군가 천사를 만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되면, 천사를 본 그 몇몇 사람이 떠들어대며 나다니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하던 일, 해야 할 일들을 다 팽개치고, 집어치우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나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부탁하는 일에도 시큰둥하게 되고, 토요일 오후에 복권 파는 집 앞에 긴 줄을 서듯 천사를 만나는 일에만 매달릴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곧 만나게 될 그 천사가 정말로 "담배 있어?" 하고 물을지 모른다며 몇 가지 담배도 좋은 걸로 좀 사놓고…….

 

천사를 만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그게 신문에 난다든지 하면, 미쳐버릴 거라고 해서 '그래, 잊자'고 순순히 물러날 사람도 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천사를 마주하고 앉아서 "다 잊어줄 테니까, 누가 천사의 일에 대해 잘난체하고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고, 그까짓 인간이 뭘 안다고 주절대느냐고 솔선수범, 적극적으로 나서 줄 테니까, 천국에 가는 것만 보장해주고 가라"고 통사정을 하거나, 그 천사가 막무가내로 고개를 저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마지막 수단으로 윽박질러보거나, 조폭을 동원해볼까 생각해보거나, 돈으로 안 되는 일을 본 적이 없는 '경험'과 그 '신념'으로 5만원권 박스 준비해둔 걸 보여주거나, 그것도 저것도 통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해 볼 준비를 하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딱 한 마디만 들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천사가 어디 할 일이 없어서 인간들의 수작에 넘어가겠습니까?

천사의 주문은 의외로 간단할 것 같습니다. 그 천사가 만난 바로 그 인간 앞에서, "걱정할 거 없어. 너는 곧 나를 잊게 될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이 한마디만 하면 정말로 잊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사를 만났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면 ―우리가 만난 그 천사로부터 그 말을 듣지 않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사가 써먹는 그 키워드(Key Word)를 이렇게 짐작해보면서도 서글픔을 느낍니다. 어쩌다가 나를 스쳐가는 천사가 "젠장,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담배 가진 거 있어?" 그렇게 물으면 47년을 피우고 끊었다고 해야 합니까?

더 서글픈 건 나에게는 천사가 다녀간 것 같은 기시감(旣視感)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꿈도 자주 꾸고, 퇴임한 이후로는 지난밤의 꿈들을 생각나는 대로는 다 기록해 두고 있지만, 천사와 연관이 있을 만한 꿈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는 사실도 그렇습니다.

 

나 같은 사람 말고, 착한 일 자주 하고,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천사를 만나면서도 나처럼 다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바빠서, 무심해서, 딴데 신경 쓰느라고, 천사를 만난 사실에 대한 기시감까지 잊어버린다면 그건 참 억울한 일일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도 다 부질없는 것입니까? 나 같은 인간은 날마다 여러 명의 천사를 만나면서도, 꾀죄죄한 일들 가지고 속상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산다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서대경 시인의 「천사」를 읽고 '괜히' 천사 만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시인도 아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서 겨울이 오고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 시를 보더라도 천사가 내려올 확률이 더 높은 겨울, 눈 내리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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