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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기억해 내기」 기억해 내기 혼자 진 꽃. 진 채 내게 배송된 꽃. 발송인을 알 수 없던 꽃. 그 꽃을 기억해 냈다. 슈베르트 음악제가 한 달간 열린 알프스 산간 마을 한가로이 풀꽃에 코 대고 있는 소 떼들이 목에 달고 다니는 방울 그 아름다운 화음에서 - 조정권(1949~ ) 기차를 타고 가다가 며칠 전 신문에서.. 2012. 5. 11.
「병 속에 담긴 편지」 신문에 얼마 있지 않아 우리나라 1인당 GDP가 3만불이 되고, 심지어 일본을 추월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모두들 "신난다!"고 환호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게 어쩐지 그렇게 반갑지 않습니다. 별로 반가운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좋아지나 싶은 것입니.. 2012. 4. 26.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고진하 벵골 땅에서 만난 늙은 인도 가수가 시타르를 켜며 막 노래 부르려 할 때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울자 가수는 악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저 새가 내 노래의 원조元祖라고. 그리고 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울음을 그치고 날아갈 때까.. 2012. 4. 10.
송수권 「내 사랑은」 내 사랑은 송수권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쪽 배밭의 배꽃들도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해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 『한국경제』 2012.3.12.A2면. 「이 아침의 시」(소개 : 고두현 문화부장·시인(kdh@hankyung.. 2012. 3. 13.
김사인 「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백년이나 이백년쯤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 2012. 2. 20.
김원길 「立春」 立 春 아침에 문득 뒷산에서 다르르르르 다르르르르 문풍지 떠는 소리가 난다. 아, 저건 딱따구리가 아닌가 맹랑한 놈 얼마나 강한 부리를, 목을 가졌기에 착암기처럼 나무를 쪼아 벌레를 꺼내 먹는단 말인가 아직 눈바람이 찬데 벌레들이 구멍집 속에서 기지개 켜며 하품소리라도 냈단 말인가. 옛사람들은 무얼로 벼룻물이 어는 이 추위 속에 봄이 와 있는 걸 알았을까 감고을축입춘(敢告乙丑立春)이라 써서 사당 문에 붙이는데 다르르르르 다르르르르 뒷산에선 그예 문풍지 떠는 소리가 난다. 김원길 『들꽃 다발』(길안사, 1994) 입춘이 지난 지 2주째입니다. 한파가 몰아치고 체감온도는 영하 십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창문 너머로 먼 산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람들 입방아도 무섭습니다. "봄이 왔.. 2012. 2. 17.
「요즘 술 뺏아 먹는 법」 요즘 술 뺏아 먹는 법 길에서 나는 정년을 서너 달 앞둔 대선배 술고래 선생과 마주쳤다. 아프도록 손아귀를 쥐고는 엘리뜨 선생, 나 술 한 잔 살테니 내 이야기 좀 들어주소. 이 나라가 이래서 되겠소. 어중이 떠중이 또 다 나선다는 거요 헌데 김 선생, 언제까지 조국을 이 쓰레기.. 2012. 2. 14.
최하림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최하림(1939- )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만약 올해의 입동(立冬) 소설(小雪)을 지나 '이젠 정말 춥구나' 싶을 때 우리에게 다시 겨울이 온 걸 느끼고 인정하는 시 한 편.. 2011. 12. 15.
최승호 「23 언젠가는」 23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 없는 버스정거장에 키 큰 바다풀이 서 있으리 23-1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 펭귄들이 서 있을까 23-2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서 누군가가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바지를 입고 나처럼 구두를 신고 나처럼 가방을 든 채 말이다. 오래전에 발굴된 직립인간의 동작을 흉내 내듯이 그는 두 팔을 앞뒤로 흔들고 두 발을 번갈아 내밀면서 계단을 내려와 둥근 시계를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아홉 시, 얼마나 많은 아홉 시들이 있었던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아홉 시들이 있었고 아홉 시에 굴러가는 바퀴들과 아홉 시에 사라지는 날개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는 부재지만 당신도 부재고 불어나는 인류 전체가 부재다. 지하철역의 큰 거울 앞에 서서 부재를 기념하는 독사진을 한 장 박.. 2011. 12. 12.
전재승 「안개꽃 사이로」 안개꽃 사이로                       전재승 사랑이여.안개꽃 사이로너를 그려본다.불러도 대답할 리 물론 없지만더러는 아련한 미소로 다가와별이 되고, 꽃이 되고바다가 되는 내 사랑흔들리는 창문 너머로노래가 되고, 목숨이 되는내 사랑 너를 위하여     부르면 대답할 사랑, 지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느 역에 이 詩가 새겨져 있어도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지도 않겠지요.그러므로 이 詩는 이도저도 다 지나가버린 사람을 위로하는 詩일 것입니다.사랑이여.이미 흘러가버린 우리의 일들은 어떻게 합니까? 한때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이러지 말고 진작 시인이 되었다면, 어느 역에 이처럼 고운, 누군가 당장 곡을 붙이고 싶을 시 한 편, 그 딱 한 편이라도 새겨진다면 차라리 얼.. 2011. 11. 27.
허윤정 「노을에게」 노을에게 허윤정 바람은 꽃도 피워 주며 사랑의 애무도 아낌없이 하였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 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이렇게 해지는 오후면 노을은 후회처럼 번지고 새들은 슬픈 노래로 자기 짝을 찾는다 이대로 영원일 수 없다면 우리 어떻게 이별할 수 있을까 사랑아 우리 기꺼이 이별 연습을 하자 나 또한 지워져 버릴 너의 연가 앞에서 저 물든 노을은 분홍 물감을 흩뿌리듯 강 건너 먼 대숲 산모롱이 누가 손을 흔든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토라져 버리니까- 모두들 그 사랑에 관하여 토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 덧없음이란……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울려오는 것이겠지요. .. 2011. 10. 31.
「도서관은 없다」 도서관은 없다 최 금 진 도서관 의자들이 모두 일어나 반란군처럼 밖으로 뛰쳐나가고 취업을 위해 앉아 있던 의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서관 의자들과 한바탕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실업의 인간들이여 투항하라 실업은 도서관장님이 해결할 몫이 아니다 세상은 봄이어서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 2011.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