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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병 속에 담긴 편지」

by 답설재 2012. 4. 26.

 

 

 

 

 

  신문에 얼마 있지 않아 우리나라 1인당 GDP가 3만불이 되고, 심지어 일본을 추월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모두들 "신난다!"고 환호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게 어쩐지 그렇게 반갑지 않습니다. 별로 반가운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좋아지나 싶은 것입니다.

 

  CCTV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 달고 학교보안관을 정해 놓아도 학교폭력은 자꾸 늘어나고 흉악해집니다. 옛날에도 학교폭력은 있었지만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기 때문입니다.

  26년을 쓸 수 있는 전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훨씬 더 밝아집니까? 아니면, 전구 사는 데 필요한 돈이 아주 적게 들어가서 돈을 다른 곳에 실컷 쓸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전철을 타면 똑똑해보이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만해도 충분히 똑똑하니까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스마트폰("SMART" PHONE)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우리들 바보 같은 몇 명만 풀이 죽은 말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아서,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은 전철을 타도 이제 신문도 안 보고, 책도 안 보고 살아도 되는데 우리는 이 꼴이 뭔가 싶기도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시골을 찾아가 취재한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나고 있고, 그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그걸 보여주는 텔레비전 화면들은 "아직도 시골 인심(人心)은 충분히 좋다!"고 설명하지만, 내 생각은 이미 그렇지 않습니다.

  '저게 거짓말이지, 아마? 이제 시골 인심도 다 달라졌다는데, 고약해졌다는데…………, 귀농을 하면 괄시가 심하다던데…………'

 

  '그러지 말고 차라리 도로 옛날로 돌아가면 밤하늘에 별들도 뜰 텐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살펴보니까 시인이 벌써 그 이야기를 해놓았습니다.

 

  도로 옛날로 돌아가면 억지로 웃지 않아도 웃을 일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더 좋은 세상이 되거나, GDP라는 걸 많이 늘여서 더 좋은 세상이 되거나, 어쨌든 더 좋은 세상이 되면, 그걸 설명하지 않아도 살아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자꾸 더 좋은 세상이 된다고 강조하여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살아가기가 참 팍팍한 나날에,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나날에,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들으면 뭐가 뭔지 잘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앞에 나서서, "웃을 일이 없어도, 웃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강의료를 받아가지만, 웃고 싶지 않고 웃을 일도 없는데 왜 웃습니까? 정말로 그렇게라도 웃어야 합니까? 그게 정상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웃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이 시를 읽고 나서 이 시인처럼 살고 싶어졌습니다.

 

 

 

 

 

병 속에 담긴 편지

 

 

                                                                                                                                        김   근

 

  밤이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길들은 모두 샅샅이 드러나고 세상의 말들은 모두 자명해졌습니다 자명해졌으나 점점 빛이 바래가고 그늘이란 그늘은 모두 조금씩 제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우리의 음지식물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좋아했지요 드디어 꿈꾸던 세상이 왔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곧 사람들은 당국을 지지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잃었어요 어떤 어둠도 거느리지 않은 사람들은 점점 밝아졌지요 밝아지다 희미해졌어요 대지도 나라도 희미해졌지요 계속되는 대낮이 고통일 줄은 그때는 몰랐던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을 느끼는 일도 슬피 우는 일마저도 곧 검열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곳의 괴물들은 무사한지요 밤의 골목들을 어슬렁거리던 괴물들은 이제 이곳에선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따금 숨어들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에 쓰러져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괴물들이 한두 마리 발견되곤 했지만 벌써 그것도 옛날 이야기지요 그들은 모두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날로 처형되었다는 소문만 떠돌다 금세 흩어질 뿐이었습니다 거리는 다시 깨끗해지고 형체가 불분명한 것들이 모두 치워졌지만 거리를 이루던 모서리들은 햇빛 속에서 밝아지고 희미해지고 제 날카로운 경계를 아주 버려버리더군요 사람들도 사물들도 병약하거나 죽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병도 죽음도 괴물들 탓이었다고 당국은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약하나마 밤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우선 조금씩 모호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국의 눈을 피해 우리는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는 황급히 세상의 밝음 속으로 숨어들곤 하지요 그럴 때마다 각자의 몸에 조금씩 명암이 생겨나는 걸 목격했어요 명암을 낯설어하던 우리들은 어느새 더 자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희미한 사람들이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찾아가고 있어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효과가 빠른 편에 속하지요 더디고 더디지만 우리를 품어줄 어둠이 이 나라 곳곳에 한 뼘씩이라도 생겨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에 우리는 무척 고무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괴물들을 좀 보내주십시오 흐물거리는 놈으로 한 서너 마리쯤이라면 밝음을 틈타 국격의 검문은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칙칙한 담벼락도 몇 장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네요 부디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기는 합니다 희미한 나라의 희미한 주민들은 희미하게 점점 더 희미한 아기를 낳고 통증도 없이 오늘도 희미한 웃음을 그것이 웃음인 줄도 모르고 웃고만 있습니다 당신의 괴물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한다면 희미해지다 못해 아주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곳의 싱싱한 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괴물을, 괴물을, 기다리고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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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근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現代文學』 2011년 7월호, 132~133쪽.

 

 

 

 

 

  <덧붙임>

 

  "선생께서도 거기에 글을 써주시면 참 좋을 텐데요…… 선생께서 쓴 글이라면 아무리 간단한 글이라 해도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츠바이크를 존경하고 높이 기리는 이 남아메리카에서 쓴 글은 메시지를 담은 병이 되어 바다 건너 프랑스에 다다를 겁니다. 프랑스 사람들 역시 선생은 좋아하니까요. 값을 따질 수 없는 귀한 글이 될 겁니다."

                                                                로랑 세크직·이세진 옮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현대문학, 2011),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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