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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허윤정 「노을에게」

by 답설재 2011. 10. 31.

 

 

 

노을에게

 

 

허윤정

 

 

바람은 꽃도 피워 주며

사랑의 애무도 아낌없이 하였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

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이렇게 해지는 오후면 노을은 후회처럼 번지고

새들은 슬픈 노래로 자기 짝을 찾는다

이대로 영원일 수 없다면

우리 어떻게 이별할 수 있을까

사랑아 우리 기꺼이 이별 연습을 하자

나 또한 지워져 버릴 너의 연가 앞에서

저 물든 노을은 분홍 물감을 흩뿌리듯

강 건너 먼 대숲 산모롱이 누가 손을 흔든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토라져 버리니까- 모두들 그 사랑에 관하여 토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 덧없음이란……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울려오는 것이겠지요.  위로가 되는 것은, 보십시오. 시인도 그러지 않습니까? "사랑아 우리 기꺼이 이별 연습을 하자"

 

 

 

 

선배와 함께 가을 길 산책을 나섰습니다.  곳곳에 단풍진 잎들이 곱고 애처로웠습니다. '이것이 사랑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곧 저 잎들이 다 지고 말겠는데요?"  그러자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래도 저 나무들은 내년에 다시 새 잎을 달게 되고 다시 고운 단풍이 들 수 있지 않아요?"  "…………"

 

 

"배는 새벽에 다시 출발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김인환 옮김, 『연인』(민음사, 2011), 133.

 

 

'선배님도 저 나무처럼 오래 살면, 덩달아 저는 더 많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게 도리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유치한 대화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이 반복이 뚝 끊어져버리면 우리에게 가을은 그만 다시는 오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기어이 그런 시간이 온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음울하고,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외롭습니다. 무섭기도 합니다.

 

 

어느덧 이 해의 시월, 그것도 마지막 날입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김동규)도 있고, '잊혀진 계절'(이용)도 있습니다. 그 노래들은 애잔하고, 좋아하는 이도 많은, 빨갛고 노란 낙엽 빛깔입니다. 그 찬란한 빛깔에 비해 내 선배와 나의 잊혀진 계절은 음울하고 회색빛입니다. 그리하여 그 선배와 나에게는 사랑 또한 회색으로 빛바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저 시인의 프로필입니다.

 

경남 산청 출생. 1975년 『여성중앙』 백만원고료 문예작품 당선 및 1977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 등단. (사)대한주부클럽연합회 ‘시문회’ 회장 역임. 현재 피천득∙이원섭∙허정자 등이 참여하고 있는 ‘맥’ 동인 편집인.              

                               <대구일보 2004.12.24. 인터넷 신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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