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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최승호 「23 언젠가는」

by 답설재 2011. 12. 12.

23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 없는 버스정거장에

키 큰 바다풀이 서 있으리

 

 

23-1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

펭귄들이 서 있을까

 

 

23-2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서 누군가가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바지를 입고 나처럼 구두를 신고 나처럼 가방을 든 채 말이다. 오래전에 발굴된 직립인간의 동작을 흉내 내듯이 그는 두 팔을 앞뒤로 흔들고 두 발을 번갈아 내밀면서 계단을 내려와 둥근 시계를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아홉 시, 얼마나 많은 아홉 시들이 있었던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아홉 시들이 있었고 아홉 시에 굴러가는 바퀴들과 아홉 시에 사라지는 날개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는 부재지만 당신도 부재고 불어나는 인류 전체가 부재다. 지하철역의 큰 거울 앞에 서서 부재를 기념하는 독사진을 한 장 박아둘 것.

 

 

 

 

 

 

"23 언젠가는 // 언젠가는 나 없는 버스정거장에 / 키 큰 바다풀이 서 있으리"를 읽는데 가슴이 '철렁' 했습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렇겠지. 내가 없어진 날에…… 내가 없어진 날이니까 바다풀이나 서 있겠지. ……

세상은 그렇게 되어 버릴까? 내가 없어졌으므로, 내가 없어져 버린 세상이므로?

 

"23-1 // 언젠가는 나 없는 지하철역에 / 펭귄들이 서 있을까"

그래? 펭귄이 그 자리에 서 있게 될까? 내가 늘 다니는 그 지하철역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야, 내가 없는 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야 나 같으면 내가 없어져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도 하다가,

 

23-2를 읽으며, 저렇게 구체적이어서 설명할 것도 없는 '설명'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그렇겠지. 키 큰 바다풀이라니, 더구나 펭귄이라니, 내가 사라져 간 날에도 사람들이 그 버스정거장, 그 지하철역에 서 있고, 걸어다니고, 회사에 가고, 시계를 쳐다보고, 그렇게 하겠지. 끝없이 끝없이 그런 날들이 이어지겠지. 오늘처럼, 오늘 아침나절이나 저녁나절의 나처럼, 나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것처럼, 우리 아버지와 엄마, 뿐만 아니고 내가 알던 사람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다 그렇게 되었는데도, 그런데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먼저 간 다른 사람들처럼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고 가방을 들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나도 정말 아득한 옛날 그 직립인간처럼 두 팔을 앞뒤로 흔들고 두 발을 번갈아 내밀면서 계단을 내려와 둥근 시계를 쳐다보고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나보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라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나보다 젊고 씩씩하고 아름다운 저 사람들도 나처럼, 직립인간처럼 그렇게 하다가 언젠가는 또 나처럼 사라져 가겠지.

그렇지만 남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이 일을? 정말 사라지고 마는 걸까? 예외가 없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건! 키 큰 바다풀이라니, 더구나 펭귄이라니, 별 쓸데없는……

 

독사진 한 장 박아두면 될까, 되는 걸까? 뭐가 된다는 걸까? 일단 독사진 한 장 박아두면 뭐가 좀 달라진다는 걸까?

뭘 기념하는 사진이 될까? 일단 박아두기나 할까? …… 사진부터 준비해 놓고  생각해볼까?

 

 

『현대문학』 2010년 4월호 '텍스트에 포개놓은 사진'란에 김화영 작가가 소개한 시입니다. 최승호, 「23 언젠가는」 부분, 『아메바』, 문학동네 p. 62-63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