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최하림(1939- )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만약 올해의 입동(立冬) 소설(小雪)을 지나 '이젠 정말 춥구나' 싶을 때
우리에게 다시 겨울이 온 걸 느끼고 인정하는 시 한 편을 찾고 싶다면 이 시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한 행(行) 한 행(行) 읽어 내려와 여기에 이르렀을 때
'한 편의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그 초겨울 아주 멀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한 어린 영혼의 빛살이 조용히 흩어져 내린 그 산기슭, 차가워서 더 빛나는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소설을 읽어도 '나는 왜 다른 이들처럼 감동을 얻지 못할까' 낙담하며 마지막으로 다시 찾아 읽어본 『의사 지바고』 상상 속의 그 차가운 자작나무 숲도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그 대학을 다니며, 이를 데 없이 차갑고 건조하여 그처럼 어려운 겨울을 날 때, 내가 사가지고 들어간 담배 아니면 담배 한 개피도 태울 수 없었던 가난한 친구 L의 차가운 시편들도 떠오릅니다. 그 친구는 평생 술을 마셔댔기 때문에 시를 쓸 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묻지 않았겠지만, 나는 지금 그가 그 이후로는 전혀 시를 쓰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격려해 주었다면 시를 썼을 억울한 친구 L의 어쩔 수 없어서 게으르고 한많은 그 생애를 떠올립니다.
내가 복잡할 때, 어렵구나 싶을 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텐데, 그래도 걱정스럽고 마음 스산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때
그런 걸 잊을 수 있도록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 주는 일은,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중앙일보(2011년 12월 15일 29면) 「시가 있는 아침」에서 본 시입니다.
- 이 남쪽 섬의 조용한 초겨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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