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3

남진우 「꽃구경 가다」 꽃구경 가다 남진우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엔 으레 저승사자가 하나씩 붙어 있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 다가가면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 꽃그늘에 앉아 잠시 숨 고르고 꽃들이 내뿜는 열기 식히노라면 저무는 하늘에 이제 마악 별이 돋아나고 내가 가야 할 길 끝에 환히 열린 꽃마당이 보인다 저승 대문 닫히기 전 저 꽃마저 보지 않으련 은근히 속삭이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 2011. 1. 24.
윤예영 「강을 위한 망가」 강을 위한 망가 윤예영 일요일 오후 산책을 해요 강변을 따라 걷지요 엄마들은 쇼핑카트에 인형 얼굴을 한 아기들을 태우고 아빠들은 빨강 파랑 노랑 헬맷을 쓰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요 햇살은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러니까 두 시와 세 시 사이에서 초당 일 도씩 기울구요 젤리처럼 출렁이는 강물 위에는 고무 오리가 헤엄을 쳐요 리뉴얼된 강에는 갈대나 잡풀은 자라지 않아요 대신 헬륨가스를 빵빵하게 채운 풍선들이 노래를 해요 이 강은 폭 1.5미터 길이 400㎞의 첨단시스템으로서 자체정화시스템과 자동수위조절장치를 부착하여 조심하세요! 아이들이 카트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요 엄마, 내가 풍선이 지껄이는 잔소리까지 들어야겠어? 그리곤 귀여운 무릎을 구부리며 물수제비를 뜨지요 고무 오리가 날아오르고 그렇지! 풍선이 .. 2011. 1. 14.
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號 하나 달아드.. 2011. 1. 3.
윤석산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환지통幻肢痛·6 윤석산 제가 지금 쓰고 싶은 시는 '사랑'이라고 쓰면 그 모습이 더욱 발그스름해지면서 어감語感이 탱글탱글한, 그리고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까르르 웃으며 무수한 빛살이 쏟아지는 청보리밭이랑 사이로 도망가는 그래서 지난 사월 한 잎 한 잎 지던 벚꽃이었다가 분홍 나비가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런 시인데 사지四肢를 절단한 후 뇌신경세포의 착각으로 없는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아프다는 테마로 연작시를 쓰기 때문인지 창문 밖 아파트 공터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옆 동 영감 이야기를 쓰고 싶어 원고마감 기일을 넘기고도 이렇게 낑낑대고 있습니다. * 그 영감님, 지난여름 뇌수술腦手術을 받은 뒤 간병看病교육을 받으러 간 아내를 생각하며 혼자 점심을.. 2010. 12. 8.
박재삼 「머석과 거석」 '참 거시기하다'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얼굴 한번 쳐다보고 말면 그만인 일이긴 하지만 심각한 논의를 하거나 그런 논의로써 뭘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속 터지는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런 표현이 역시 오묘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몸이 좀 괜찮다 싶은 어느 주말, 누구네 혼사로 자연스럽게 모였다가 헤어지는 전철 안에서 교육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사람이 역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어느 분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퇴임 후에 무슨 종교에 관한 일을 열성적으로 하다가 병들어 사망했다면서 그랬습니다. "그분은 평소에도 워낙 저-기한(저어기한) 분이었잖아요." '저-기한 분' '저-기하다'? 그가 지금도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게 이젠 신기하게 느껴지지.. 2010. 11. 22.
나희덕 「비오는 날에」 비오는 날에 나희덕 (1966~ )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이 비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시입니다. 비오는 날에. 내 튼튼한 우산의 안락함만으로 지낸 것.. 2010. 7. 30.
파블로 네루다 「구름에게」 우리는 구름에게, 그 덧없는 풍부함에 대해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 정현종,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 읽기」(현대문학, 2007년 7월호) & (시 9의 다섯 연 중 둘째 연, 『질문의 책』 문학동네 2013) 2010. 7. 21.
박재삼 「천지무획(天地無劃)」 '스승의 날'입니다. 오늘은 좀 일찍 마쳤는지, 중학생 몇 명이 신나게 떠들며 아파트 마당을 가로질러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블로그를 열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커피도 내려 마시고 신문도 보고 했지만 잊히지 않아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 교장공모제 지원서류를 인쇄소에 제본 의뢰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시장에 저는 섰습니다.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이겨 내고 교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죠? 사고 팔고 이기고 지고 이런 것이 싫어서 선생님이 되었었는데요. 쓰디쓴 마음에 선생님 블로그에 들어와 아직도 향기 가득한 꽃 한 송이 보고 돌아갑니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만 아직도 교육의 길은 끝이 없고 아이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운데 교육계는 환멸을 .. 2010. 5. 15.
김원길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퇴임을 하고 나니까 사람들과의 인연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제 맺어진 인연을 잘 지키고, 굳이 새로운 인연을 찾아나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소년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가가다가 상처를 입고 눈물 글썽입니다. 더구나 이제 그 쓰림은 당장 의기소침으로 이어집니다. 잊혀져가던 인연들을 다시 생각하는 새벽에, 오늘도 가슴이 저렸습니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를 쓴 김원길 시인은, 1960년대의 누추한 제게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는 지례예술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당시에는 안동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 대학입학시험에 출제될 문제를 잘 가르치는 데.. 2010. 5. 5.
박형권 「털 난 꼬막」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허 참 허 참…… 내가 퇴임을 했으니 ……' 하며 지내다가 『현대문학』 3월호를 보고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설명을 해보려고 덤벼들어 봐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김사인 시인의 말에 따르면 대책이 서지 않는 시 한 편을 옮깁니다. 시인 자신이 화자(話者)인, 그 시인의 가계사(家系史)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그 중에서도 지금 노년기에 들어선 사람치고 이 가계사의 주인공보다 나은, 이보다 화려한 세월을 보냈다고 큰소리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사인 시인의 감상문 또한 한 편의 시와 같아서 시 아래에 그대로 옮깁니다. 「털 난 꼬막 Ⅱ」가 될 만한 감상문입니다. [박형권 시인의 시집 『우두커니』(2009, 실천문학)에서 김사인 시인이 뽑.. 2010. 4. 19.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그게 가버렸다면, 그것들은 어디로 갔지? -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189, 정현종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 읽기」 22. 2010. 4. 8.
박인환 「목마와 숙녀」Ⅱ 「자작나무숲의 작은 세계에서」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고1 여학생입니다. 2006년 가을엔가 '바다를 비추는 등대'라는 제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인디언식이네?" 했더니 자신의 이름은 '생각하는 자작나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그 아이의 블로그를 찾아가 봤더니 469편의 글이 실려 있고, 이 아이의 호흡을 따라잡기가 이처럼 어렵구나 싶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몇 자 적어 놓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초등학교, 더구나 당시의 교장 따위를 상대하고 싶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일이지요.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고, 시험성적도 월등하고, 조용하고 …… 비범합니다. 그 블로그 메인 화면을 캡쳐해 왔습니다. 상대해 주지도 않는 '상대'지만... 블로그 「자작나무숲의 작은.. 2010.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