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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남태식 「청명」 서정주 「花蛇」 청 명 남태식 맑은 눈은 아름답다 중년에 들었어도 맑은 눈은 더 아름답다 그 사내는 눈이 참 맑았다 눈이 너무나 맑은 그 중년의 사내 생각하다가 속내를 감춘 눈이 붉은 나는 또 도마뱀처럼 몸이 달았다 전철역에서 본 시입니다. "속내를 감춘 눈이 붉은 나는 또 뱀처럼 / 몸이 달았다"였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봤더니 "속내를 감춘 눈이 붉은 나는 꼭 뱀처럼 몸이 달았다"로 소개되고 있기도 했습니다. "속내를 감춘 눈이 붉은 나는 또 뱀처럼 몸이 달았다"도 좋고, "속내를 감춘 눈이 붉은 나는 꼭 뱀처럼 몸이 달았다"도 좋은 것 같습니다. 다만 둘 중 한 가지가 더 적절할 것이 틀림없고 시인은 그렇게 썼을 것입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눈이 너무나 맑.. 2011. 10. 12.
임만근 「행복론」 Ⅰ 칠 전 아파트로 들어오는 셔틀버스 운전기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잔잔한 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아파트 셔틀버스 두 대의 기사님은 두 분 다 매우 조용한 분들입니다. 처음에는 아직 낯이 설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벌써 반 년이 다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인사를 받는 것조차 쑥스러워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그동안 쓸데없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월급이 너무 적어서 기운이 나지 않는가?' '늘그막에 작은 버스 운전이나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나?' …… 그러다가 깜짝 놀란 일이, 바로 기사님의 그 발언을 들은 것입니다. "잔잔한 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날 저녁 때, 아파트 저 아래 동네에서 한 아주머니가 승차해서 기사님 옆 자리에 앉았는데, 기사님과 익숙한 사이 같았습니다... 2011. 9. 17.
「기차는 간다」 기차는 간다 허 수 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그리운 것들만 가는 걸까? 나를 남겨 놓고 저.. 2011. 8. 11.
「군산 서해방송」 군산 서해방송* 심창만 푸른 유리병에 석유 사러 갈 때 산 노을 넘어오던 어부들 안부 바다보다 깊은 산골 나 어릴 때 귀머거리 염소와 함께 듣던 방송 빈 부엌에서 눈 젖은 쥐들이 쥐약을 먹을 때 군산시 해망동의 한 미망인이 가느다란 전파로 「해조곡」을 불러주던 방송 쇠죽 끓이다 말고 집 나가고 싶을 때 식은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듯 오래오래 내 귀를 들여다본 방송 흘러간 노래보다 내가 더 멀리 흘러온 것 같은데 아직도 노을을 보면 석유 냄새가 나는 방송 기다리기도 전에 가버린 세상처럼 어느새 아들은 나를 싫어하고 정말 있기나 있었나 싶은 군산 서해방송 * 군산에서 서해 어민들을 위한 방송을 내보내다 80년대 한국방송공사로 통폐합 됨. ------------------------------- 심창만 196.. 2011. 7. 26.
「오래된 밥」 오래된 밥 최 준 말로 자라는 아이와 밥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밥 먹은 아이는 엄마에게 말을 뱉어내고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밥이 만드는 말을 하루 세 번씩 하얗게 씻어 안치는 엄마 어제는 공룡을 만든 아이가 오늘은 나무를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새를 만든다 아가야 넌 언제 세상을 다 .. 2011. 7. 15.
김추인 「삶의 가운데」 삶의 가운데                                                 김추인  그런 날이 있다사는 날이 다 별 것도 아닌데그렇게 추운 때가 있다 신발의 흙을 떤다든가발을 한 번 굴러 본다든가하는 일이 다 헛일만 같아지고내가 하얀 백지로 사위어몇 번인지 왔을 언덕을 또 떠나며몇 번이고 몇 번이고두고 온 이승처럼 돌아보는 때가 있다 살아서도 죽은 것만 같은그렇게 사무치도록외진 혼자인 때가 있다    교대역 스크린도어에서 봤습니다.인터넷에서 뒤져봤더니 맞춤법이나 줄바꿈이 제각각이어서, 이렇게 옮겨놓는 것조차 실례가 아닐지 걱정스럽습니다. 시인이나 음악가, 화가 같은 사람들이 앞에 있다면 그렇게 하기가 난처하겠지만, 편안하게 얘기해도 좋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 2011. 6. 1.
이재무 「꽃그늘」 꽃그늘  이재무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아, 고요한 나라에서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그의 한 끼 식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시간의 물방울 천천히해찰하며 흘러갑니다     이재무 시인의 이 詩는 상봉역에 내려가 면목동 방향 중간쯤에 서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저런 자벌레다, 우리의 영혼도 저런 자벌레의 영혼일 것이다, 그런 얘기겠죠.시인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거죠. 어쩔 수 없는 거죠.자벌레라면 싫다, 밤새의 밥이 되는 건 죽어도 싫다, 그렇게 말하면 웃기는 거죠. 더구나 세상의 소음에 다쳐 꽃그늘 속으로 들어갔으니까요. 더구나 천천히 해찰하며 가도 된다고 이재.. 2011. 5. 25.
박두규 「자취를 느끼다」 자취를 느끼다 박 두 규 숲에 드니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합니다.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편백나무 아래서 입 맞추고 함박꽃 활짝 핀 관목 숲 좁은 길모퉁이에서 그대를 수없이 안았습니다. 부드러운 가슴의 박동 소리에 놀라 새들이 날아오르고 숲을 뚫고 쏟아지는 빗살무늬 화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의식을 잃고 싶은 마음으로 더욱 또렷해지는 그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은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한데 나는 왜 그대 얼굴도 떠올릴 수 없는 것입니까. 나는 왜 아직도 그대의 모습조차 그릴 수 없는 것입니까. ────────────── 박두규 1956년 전북 임실 출생. 1985년 『남민시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사과꽃 편지』 『당몰샘』 『숲에 들다』 등. 『現代文學』 2010년 9.. 2011. 5. 1.
조정인 「문신」 문신 - 조정인 (1954 ~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끄럽지만 한때 내가 죽으면 그 무덤에 세울 비석에 새기라고 부탁할 글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만나보지 못한 내 후손 중에는 나를 무슨 중시조(中始祖)나.. 2011. 4. 21.
이희중 「햇볕의 기한」 햇볕의 기한 이희중 오십억 년이 지나면 해가 없어질 거라고 한다 바로 말하자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풀어올라 아주 큰 붉은 별이 되었다가는 다시 쪼그라들어 아주 작은 흰 별이 된 다음 결국 뜨거운 먼지로 우주에 흩어질 거라고 한다 설사 지구가 녹아 사라지지 않고 더 뜨겁거나 차가워진 작은 태양을 여전히 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 산 것은 더 없을 거라고 한다 그 막막한 세월에 나는 없을 것이니 그날을 걱정하는 일은 그야말로 기우라 비웃을 만한데, 나는 벌써 우울하고 답답하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오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고작 육억 년만 지나도 이미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더워질 거라는데 우리 후손들은, 제 손으로 대를 끊지 않았다면 그 전에 이미 지구를 떠나 더 이상은 하나의 행성에 목매지 않는 우주.. 2011. 4. 4.
조 은 「적운」 적 운 조 은 여자가 뛰쳐나오자 대문이 어금니를 물었다 밖에서는 이제 문을 열지 못한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머리에서 헝클어진 바람이 뛰어다닌다 부스스한 머리가 할 말 많은 혀처럼 꼬이는 여자의 그림자를 청색 분뇨차가 뭉개며 달려간다 아이들이 그림자의 허리에서 파편처럼 튄다 여자는 제 그림자 한복판에다 가래침을 뱉는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바퀴에 끌려 올라가던 그림자의 머리채가 한 걸음도 못 가 맥없이 놓여 난다 꼼짝 않고 노려보던 데서 시선을 옮긴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떨린다 콧날이 꿈틀댄다 여자가 뛰쳐나온 대문 안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슬리퍼 끌리는 소리 수돗물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리 꿈쩍 않는 평온의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눈을 뜬다 ─────────────── 조 은 1960년 경북 안동 .. 2011. 3. 28.
金春洙 「千里香」 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 2011.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