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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인사」 인 사 고수영 길 가다 만난 친구에게 달리는 버스에게 종종 빨간 발목 비둘기에게 꼬리 살랑살랑 강아지에게 한들한들 꽃에게 먼지투성이 비닐봉지에게 가만 놓아두어도 흔들리는 그네에게 기어가는 개미에게 물을 풍풍 뿜어내는 분수에게 세 살 동생은 모두에게 "안녕, 안녕, 안녕!" ♣ .. 2012. 9. 20.
박두순 「새우 눈」 새우 눈 박두순 새우를 그렸다 눈은 까만 점만 하나 톡 찍으면 되니 아주 그리기 쉬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앞을 보나?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바다를 다니나? 고 작은 눈으로 어떻게 먹이를 찾아내나? 아니다 새우 눈은 크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넓은 바다를 보나 그 넓은 바닷길을 다니나 그 커다란 잠수함을 피하나 망원경 마음눈 가진 모양이지? ━━━━━━━━━━━━━━━━ 박두순 1950 경북 봉화 출생. 1977년 , 동시 추천. 동시집 등 10권과 시집 등 2권. 「대한민국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 수상. 『오늘의 동시문학』 2012년 가을호, 45쪽. 나이가 육십이 넘어도 아이들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 2012. 9. 13.
윤예영 「사이렌, 세이렌」 Ⅰ 세이렌이란 바다의 님프들로서 배가 지나갈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에는 듣는 자를 더할 나위 없이 매혹시키는 마력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를 들은 불행한 선원들은 불가항력적으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려는 충동을 느껴 물속에 빠져 죽고 마는 것이었다.1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정체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을 지도해 주신 전라도 어느 곳 출신 염길환 선생님은, 좀 작은 키에 장발이었고, 안경을 쓰셨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습성을 가지셨고, 언제나 다정다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주 등사원지를 긁어서 검은색 글씨의 시험지와 달리 파란색으로 인쇄하는 학교신문을 발간하시고, 그 신문 3면엔가 『오디세이』를 연재하셨습니다. 나는 토요일 오후를 기다려 그 신문을 받아 읽어.. 2012. 9. 10.
조숙향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 조숙향 하늘 사이로 구름이 흘러갑니다 구름 사이로 하늘이 흘러갑니다 하늘과 구름, 틈 사이에서 긴 여름을 견뎌낸 연보랏빛 구절초 한 송이 사뿐히 길섶으로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습니다 태풍 '볼라벤'이 물러가자마자 '덴빈'이라는 게 올라온 날 오후에 불광역 근처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비바람 때문에 스산했습니다. 차들은 바삐 돌아가고 싶어 초조해하는 것 같고, 다른 날보다 일찍 날이 저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우산이 뒤집어질 뻔했고, 어떤 여자 노인은 "아이구 추워!"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세상 일이 다 이렇습니다. 아주 더워서 가슴이 다 답답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며칠간 태풍들이 오가고 나면, 언제였느냐는듯 당장 가을입니.. 2012. 9. 4.
「빈 배처럼 텅 비어」 지난 8월 17일에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13년이나 지낸 곳입니다. 범어네거리 근처의 한 호텔에서 개최된 연수회에서, 제 강의는, 오후 1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의 두 시간이었고, KTX는 11시 53분에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5시 18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표를 끊었으므로 도착해서나 출발할 때나 각각 1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은, 요즘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시간이 좀 생겼다"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을 사람을, 그 더운 날 한낮에 '돌연' 만나자고 하면 웬만하면 만나는 주겠지만 그 속사정이 어떨지, 아무래도 그리 석연치 않은 만남일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어도 괜찮기는 합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수십 개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 2012. 8. 26.
「死者의 書」 죽어 있다는 건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또 살이 물러지고 새로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달리 할일도 없다. 메리 로취라는 사람은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스티프 STIFF』(파라북스, 2004, 권루시안 옮김, 9쪽)에서 주검 혹은 죽음 이후의 상황을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짤막한 문장에서 "누워서 지낸다"느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느니 "새로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느니 "할일도 없다"느니 어쩌고 하며 겉으로는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 한 책의 제목에서처럼 주검에 대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따듯한 눈길로 바라보듯 했지만, 사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게, 차갑게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012. 8. 23.
「카운터에 놓여 있는 성모마리아상만은」 카운터에 놓여 있는 성모마리아상만은 신경림 1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고풍스러운 마을이다. 바다에 연한 차도를 벗어나자 곧장 골목이고 양철지붕들이 처마를 맞대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마른 오징어 냄새가 물씬 나는 술집에서는 지붕들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점심을 먹으로 들.. 2012. 7. 24.
박형준「홍시」,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고상한 척해 봐도 별 수가 없는 게 인간입니다. 돈이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친구가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자녀가 많고 다 잘 되었다 해도 별 수 없는 게 인간, 죽음입니다. 그것이 생각나게 하는 시 한 편을 봤습니다. ♣ 아내는, 내가 병원에 드나들게 됐는데도 별 기색이 없었습니다. 저러다가 말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나 뭐 별 일이야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며칠간 병실에 들어앉아서 별별 검사를 다 하고 있는 걸 좀 못마땅해하기도 했는데, 큰 병원으로 옮겨 가슴을 열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일반병실에 있다가 수술을 하거나 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그 일반병실은 비워야 합니다. 아내는 그걸 모르고 '이제 드디어 죽는구나!' 했답니다. 그러니 그 병실을 .. 2012. 7. 11.
「여의도」 여의도 서효인 과제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히자 누나는 꽃을 보는 거니, 묻는다. 땅의 어디서부터 푸른 잎이 돋아나는지 모른다. 누나의 취미는 구름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 하늘의 변색을 추리하는 일, 감식은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누나는 엄마랑은 다른 거야, 울 밑에 선 작은 식물이 .. 2012. 6. 18.
「파도는」 파도는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스러짐이 좋은 것이다. 아무 미련 없이 산산히 무너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최후가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흰 포말로 돌아감이 좋은 것이다. 그를 위해 소중히 지켜온 자신의 지닌 모든 것들을 후회 없이 갖다 바치는 그 최선이 좋은 것이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혀 고고하게 부르짖는 외침이 좋은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 품었던 한마디 말을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그 결단의 순간이 좋은 것이다. 아,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는 거친 대양을 넘어서, 사나운 해협을 넘어서 드디어 해안에 도달하는 그 행적이 좋은 것이다. 스러져 수평으로 돌아가는 그 한생이 좋은 것이다. ―오세영(1942~ ) 유치환의 「파도」는 애절합니다. 그 시를 그대로 옮기고 싶은 간절함을 .. 2012. 6. 7.
「잎, 잎」 잎, 잎 낮은 山도 깊어진다. 비안개에 젖어 무수히 피어나는 속잎, 연하디연한 저 빛깔 사이에 섞이려면 인간의 말의 인간을 버리고 지난겨울 인간의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했을까? 핏줄에 붙은 살이 더러워 보인다, 잎과 잎 사이 벌거벗고 덜렁거릴 것 덜렁거리며 서 있을수록…… .. 2012. 5. 21.
「세기말 언어학자」 세기말 언어학자 차주일 '사람이 만들었으나 사람이 통제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 종교이다'라고 명명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오류를 고쳐 쓴다. 지구온난화 다큐멘타리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순교를 맞이하듯 발걸음을 버리고 말없이 서 있다. 누군가 인간이 건설한 미래를 지우고, 현재를 지우고, 만년설이 냉동해둔 과거까지 지우고 있다. 황사가 연둣빛을 처형하는 봄날, 나는 사어를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겨울 옆에 있던 초봄과 늦가을이란 단어를 삭제한다. '초'와 '늦', 그 아래 덧붙여놓았던, '계절과 계절을 잇는 능선'이란 풀이말을 읽으며, 초저녁이라고 불리었던 시간에 계절의 남은 수명을 잰다. 나는 곧, 사계를 지우고 지상에 군림할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이름과 색깔을 명명해야 한다. 사어에 붙어 있.. 2012.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