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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윤예영 「사이렌, 세이렌」

by 답설재 2012. 9. 10.

 

 

세이렌이란 바다의 님프들로서 배가 지나갈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에는 듣는 자를 더할 나위 없이 매혹시키는 마력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를 들은 불행한 선원들은 불가항력적으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려는 충동을 느껴 물속에 빠져 죽고 마는 것이었다.1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정체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을 지도해 주신 전라도 어느 곳 출신 염길환 선생님은, 좀 작은 키에 장발이었고, 안경을 쓰셨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습성을 가지셨고, 언제나 다정다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주 등사원지를 긁어서 검은색 글씨의 시험지와 달리 파란색으로 인쇄하는 학교신문을 발간하시고, 그 신문 3면엔가 『오디세이』를 연재하셨습니다.

 

나는 토요일 오후를 기다려 그 신문을 받아 읽어보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당연히 몇 회 연재되지 못한 채 선생님은 멀리 떠나시고 학교신문도 폐간되었습니다. 그 옛날, 그 시골구석의 학교에서 학교신문이라니,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호사였지요.

 

그때는 세이렌이 누군지, 뭐하는 여자들인지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그 연재가 거기까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오디세우스(율리시즈)는, 그리스로 귀국하는 길에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어쩌면 트로이 전쟁에서보다 정작 귀국 길에서 더 큰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엮은 서사시가 저 유명한 『오디세이』입니다.

 

우선, 항구도시 이스마로스에 상륙했다가 키콘족과의 무력 충돌로 부하를 많이 잃었고, 이후 9일간의 표류 끝에 로토파고스(연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의 지명)에 도착해서는 그곳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며 먹어보라고 한 연(蓮)을 입에 댄 세 명의 부하가 그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었기 때문에 강제로 끌고 와서 배의 긴 의자에 묶어두어야 했습니다.

 

커다란 눈 하나가 이마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양치기 거인들이 사는 키클롭스에서는,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붙잡혀 그 거인의 식사 때마다 두 명씩의 부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거인은 그들을 맛있게 먹어치우면서 오디세우스에게는 마지막에 먹겠다고 했습니다.

 

아이올로스섬에서는 제우스로부터 바람의 지배권을 위탁받은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항해에 방해가 되는 바람을 넣고 은사슬로 묶은 가죽자루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보물이나 든 줄 알고 은사슬을 풀어버린 어리석은 부하들 때문에 아이올로스섬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평화로운 풍취에 매혹되어 육지로 둘러싸인 만에 들어갔다가 라이스트리콘이라는 야만족을 만나 오디세우스의 배를 제외한 다른 배의 선원들이 전멸하는 참사도 겪습니다.

 

마침내 태양신의 딸 키르케가 살고 있는 아이아이에섬에 도착합니다. 이 섬에는 키르케의 마술에 걸린 사람들이 동물로 변신한 사자, 호랑이, 늑대 같은 짐승들이 살고 있었는데, 오디세우스의 부하들도 키르케의 마법의 지팡이가 닿자 돼지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신의 충고를 들은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을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모두들 융숭한 대접까지 받게 됩니다. 어찌나 대접을 잘 받았던지 오디세우스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환락에 중독되어서 부하들이 깨우쳐 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이 있는 해변을 무사히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선원들의 귀를 밀초로 막아버린 다음 그 부하들로 하여금 오디세우스의 몸을 돛대에 단단히 묶어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온한 바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랫소리에 취한 오디세우스가 제발 결박을 풀어달라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상이 Thomas Bulfinch가 지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29장 중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요약한 것입니다.2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항해와 모험담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귀향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고난이고 뭐고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나도 그렇게 여겼었는데, 지금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길지도 않은 세월이지만 살아온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눈이 하나밖에 없는 괴물도 만났고, 지금은 뭘 하는지 늘 궁금하지만 도무지 연락할 길 없는 사람들도 있고, 뭘 어떻게 할지 몰라 한없는 표류를 하기도 했고, 난데없는 도움을 받아서 일어서기도 했고………… 아, 세이렌도 만났습니다.

 

누구나 이런 모험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저 오디세우스처럼, 그리고 나처럼 각자의 운명에 따라 세이렌도 만납니다.

 

세이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느 세이렌의 속삭임을 들어 보십시오.3

 

 

사이렌, 세이렌

 

 

                                                     윤예영

 

내 마음은 쉽게 물보라 일고

격랑이 치는 용소

그대 노 저어 오지 마세요

배 띄우지도 말고

발 담그지도 마세요

오랫동안 그 위에 서서

지루한 휘파람이나 불어주세요

그럼 가끔은 혼자 출렁이며 돌아눕거나

바람이랑 수작이라도 부리다가

착한 물처럼 얌전히 물안개나 피워 올릴게

아님

배 띄워 노 저어 와

기를 쓰고 헤엄쳐 와

이 안에 가라앉든지

그대 발목에 어리석고 무거운 마음 매달고 빠져 죽든지

나는 그저 방죽 위의 미루나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만 팔랑이고 싶은 몸

그러나 천 년은 더 뒤척일 고단한 잠

비늘처럼 돋아나는 입술

겹겹의 눈꺼풀

그러니 당신,

잠깐 와서 구경이나 하다 가시길

심심하면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나 한 대 태우고 가시길

그러다 휙 자리 털고 일어나시길

유치하게 물수제비 같은 건 뜨지도 마시길

 

 

───────────────

윤예영 1977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해바라기 연대기』.

 

 

 

 

 

세이렌이라고 해서 아무나 붙잡지는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모든 남정네를 무턱대고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세이렌에게 붙잡혀 죽는 남정네는 어떻겠습니까? '이제 나는 죽는구나.' 생각하며 붙잡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붙잡히겠습니까? 마약에 취하는 것처럼, 혹은 한없이 행복한 가슴으로 붙잡히겠지요. 죽는 줄도 모르고 죽게 되겠지요.ㅎ~

 

세이렌에게 붙잡히면 죽게 된다는 걸 사전에 알게 된 오디세우스도, 막상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는 맥없이 무너졌지 않습니까? 걸리면 죽는 것입니다.

 

저 시인이 그린 저 세이렌의 속삭임 좀 보십시오. 얼마나 조용하고도 아늑합니까? 바로 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 세이렌은 노 저어 오거나 헤엄쳐 오지 마라, 그저 휘파람이나 불어 주고 가든지, 잠깐 와서 구경이나 하다 가든지,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나 한 대 태우고 가든지 하라지만, 물수제비 같은 걸 뜨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처럼 속삭이지만, 그 속삭임을 믿을 수 있겠는지, 믿어도 좋겠는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 말조차 못 믿으면 그럼 뭘 믿겠느냐고 한다면, 글쎄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한번 저 세이렌을 만났던 사람의 솔직한 모험담을 들어볼 수밖에요.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할 입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양성평등에 입각해서 세이렌은 여성도 걸리면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할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 아닙니까? 또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할 것 같기도 하지요. 얘기의 재미는 줄어들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라고 강변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P시에 아파트를 마련했을 당시에는, 그 마을에 여느 동네 치고는 제법 큰 서점이 있어서 행복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서점은 예상대로 곧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감자탕, 손칼국수 같은 두셋의 식당이 들어서더니 주인과 메뉴가 자꾸 바뀌어 나중에는 그곳에 서점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았습니다.

오늘 이 책을 보면서 마침내 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을 그 서점에서 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지낸 10여 년, 분명 사는 게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지내놓고 보니까 그때가 그립고, 그땐 참 행복했는데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건 기본적으로 행복한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근거도 없이 그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여간 그땐 지금보다는 좀 잘 나가던 때였고, 나를 만나려고 하거나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런 중에 시간을 내어 그런 서점에도 들어가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게 다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더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싶지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물건도 좋은 걸 보여주면 욕심이 나기가 쉽긴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을 때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이렌……

 

 

 

...................................

  1. Yhomas Bulfinch, 한백우 옮김, 『그리스 로마 신화』(홍신문화사, 1997), 335쪽.
  2. 위의 책, 328~337쪽.
  3. 『현대문학』 2011년 10월호, 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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