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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빈 배처럼 텅 비어」

by 답설재 2012. 8. 26.

 

 

 

 

 

 

지난 8월 17일에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13년이나 지낸 곳입니다.

 

범어네거리 근처의 한 호텔에서 개최된 연수회에서, 제 강의는, 오후 1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의 두 시간이었고, KTX는 11시 53분에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5시 18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표를 끊었으므로 도착해서나 출발할 때나 각각 1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은, 요즘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시간이 좀 생겼다"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을 사람을, 그 더운 날 한낮에 '돌연' 만나자고 하면 웬만하면 만나는 주겠지만 그 속사정이 어떨지, 아무래도 그리 석연치 않은 만남일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어도 괜찮기는 합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수십 개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허! 이 사람이 웬일이야?" 어떻고 하면서도 "가만히 있어 보자……" 어떻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누굴 데리고 나갈까 묻기도 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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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녀가자.'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어떤지 보자.'

'어차피 곧 그렇게 될 것 아닌가…… 아는 사람들을 가방처럼 챙겨서 다닐 것도 아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함께 떠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점심을 먹어야 했으므로 역에서 제일 시원한 식당이 어딜까 싶어 기웃거리다가 시원한 곳은커녕 적절한 메뉴를 찾기도 어려워서 국밥 한 그릇을 먹었습니다. '셀프서비스'였으므로 기다렸다가 번호가 떠올라서 가져다 먹었습니다. '셀프서비스'…… 내가 나에게 하는 서비스? 그것도 서비스라면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셀프서비스, 우리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변화는 그렇게 외래어로 명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승에 간다 해도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하겠지?'

잠시 그런 실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쪽에 선풍기가 있긴 해도 무더운 날씨라는 걸 실감하며 국그릇보다 밥그릇 비우기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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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습니다. 열차 안에서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커피 파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승무원에게 물었더니 저쪽에 오고 있다고 했는데 내릴 시간이 겨우 10분쯤 남았을 때 지나갔습니다.

 

식당 바로 옆에서 커피를 샀는데 뜨거운 날씨에 뜨거운 컵을 손에 들고 보니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역에는 시원한 곳도 없었습니다.

'호텔에 가면 시원하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고 택시를 타러 나갔는데, 택시 기사는 "범어로터리라면 저쪽 건너편에 가서 타라"고 했습니다. 난처해하는데 다른 차가 태워 주었습니다. 그게 고마웠습니다. 그렇다고 수다를 떨기는 싫어서 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모처럼 내려간 대구의 거리를 내다보며 생각만 많이 했고, 택시 기사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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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그런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담당 사무관과 주무관이 속이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교과서를 만들 교수들에게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치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서먹서먹해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무슨 수가 나거나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혹은 열차 시간이 다가온 것처럼……

 

동대구역의 오후 사정은 오전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후에도 더웠고, 갑자기 시원한 가게 하나가 새로 들어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커피를 더 마실 용의는 있었지만 모두 가게 안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테이크아웃'이 더 시원한 가게들뿐이었고, 책이나 한 권 골라볼까 싶었지만 서점도 답답했고, 아예 먹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아이스크림 가게도 답답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더 일찍 출발하는 열차로 표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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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그곳 의자에 앉아서 윗옷을 벗어 들었습니다.

'그래! 실험을 해보자는 결정을 잘했구나.'

'어디로 간들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이제 곧 정말로 이런 여행을 떠나야 할 것 아닌가!'

'한때 얼마나 분주하고, 만나는, 아니 만나야 할 사람도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고, 다이내믹했는가! 이제 그 세월들을 잊어가고,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래, 포기하고, 비우고, 맑게 하고, 그러는 거다. 그래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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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현대문학』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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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 도착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용산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15분이면 용산역으로 갈 수 있고, 그곳에서는 우리 동네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급행열차를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차표를 구입한 후에 저녁식사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봐라? 용산역의 그 급행열차 표가 매진되고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역마다 정확하게 서며 가는 일반 전철을 타야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 보기도 싫었습니다. 아직 저녁식사를 하지도 못했는데, 저녁이 되어도 무더위는 한낮과 다름없고, 어지러워서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상태로 귀가해서 2박 3일간 '주말을 이용해서' 끙끙 앓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정말로 길을 떠나서 하게 될 고생이나 외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만해도 이 세상이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영혼이 떠날 때는 살던 곳을 다녀간답니다. 그러면 호사스럽게 비서를 데리고 다닐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 그렇게 혼자서 혹은 검은 옷 입은 사자와 동행하여 다녀가겠지요.

 

 

#

 

 

이런 줄도 모르고 혹 나를 좋게 생각하는 대구의 지인들 중의 한두 사람은 더러 내 생각이 나면 '이 사람이 언제 대구를 다녀가려나?'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누가 "그 사람 영영 갔다네" 하면, 듣는 이가 그럴 테지요. "갔구먼. 하기야 뭐 안 가는 사람 어디 있나?"

 

그런데 전화는 뭐 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니, 적어도 이번 여행 같은 연습이 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