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서효인
과제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히자 누나는 꽃을 보는 거니, 묻는다. 땅의 어디서부터 푸른 잎이 돋아나는지 모른다. 누나의 취미는 구름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 하늘의 변색을 추리하는 일, 감식은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누나는 엄마랑은 다른 거야, 울 밑에 선 작은 식물이 봉선화야, 국화야? 이 정도는 알아두어야 모든 엄마를 다시 누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니은과 미음의 차이라고 해두자. 부드러운 차이는 사람을 진절머리나게 한다.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선한 이목구비로, 꽃이랑 나무의 성함을 물어오는.
당신을 누나라 부르지 않겠다. 이제 너라고 부르겠다.
너라고 부르니까 흠칫 놀란다. 놀라는 모습이 고라니 같지 않니, 말을 건다. 고라니는 약재가 아닌가, 혹은 북방의 사투리일지도. 네 눈은 쉽게 흔들리며 왼 눈과 오른 눈이 약간 다르다. 눈밭의 발자국처럼 하는 말이 뻔하다. 착하고 허망한 눈이다. 그런 눈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누이랑 누나는 엄연히 달라, 누이, 라고 발음하면 아침밥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싸줄 것 같은 너, 그건 안 돼! 느낌표 자체로 누이에게 이미 졌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요. 아버지가 진짜로 손찌검을 했던가. 아니잖아. 그럼 이제 너를 뭐라 부를까.
벚꽃 보러 가자며 팔짱을 낀다. 하얗기도 분홍이기도 한 뺨 옆으로 잎이 제 몸을 돌리며 떨어진다. 줄줄이 돋아난 나무의 생식 활동은 처참하고, 단지 과제가 떠올랐을 뿐이다. 너는 꽃과 강, 하늘과 구름, 바람과 초식동물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런 태도는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그런 지시는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팔의 안쪽을 슬며시 잡는 누나의 잎, 느낌표의 아랫도리처럼 오줌을 지릴 것 같다. 그럴 때면 하릴없이 불러보는 것이다. 누나! 멀리서, 익숙한 대답이 빌딩 사이로 돌진해온다. 편하게 불러, 라고 너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여의도에도 누나들은 당연히 있겠군요.
여성이라면 흔히 누군가의 누나일 텐데도 그게 좀 어색합니다. 여의도의 그 여인들이 누군가의 누나라니, 세상에, 참…………
사촌누나가 그리워서,
제 어릴 적 그 누나는 생각날 때마다 눈물겨워서
그 누나의 모습을 닮은 다래덩굴 사진이 보여서,
얼마 전에 「사촌누나」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이 블로그에 실었더니
그 제목을 찾아온 독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많은 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싶어서,
그 반응을 역추적해 보고는 아연 실색했습니다.
그걸 여기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 이야기하면 우리는 구구한 설명을 할 필요없이 그 순간 분명히 뭐랄까 참 어처구니없는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나' '사촌누나'를 그렇게 야비하게 다루어도 괜찮은 심성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시 「여의도」를 좀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기야 그런 사람들은, 서정주의 저 누나라도 그렇게 막 대할 것입니다.
세상은 얼마나 부서져야 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부서지는 일을 공동으로 진행해 왔다는 사실이며, 그 군중 속에 나 또한 버젓이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님.
미안합니다.
아, 참!
식당 같은 데 가보면 온 나라의 여성들이 '이모'고 '언니'고, 하여간 한가족 같은데도, '누나' '누님'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더 미안합니다.
『현대문학』 2011년 7월호(218~219) 「누군가의 시 한 편」에서 진은영 시인이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서 뽑아서 소개한 서효인 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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