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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김사인 「노숙」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 2015. 2. 25.
강은교 「등꽃, 범어사」 등꽃, 범어사   강은교  내가 못 본 사이에 등꽃은 피어버렸고내가 못 본 사이에 등꽃은 져버렸네 저문 등꽃 잎 한 장 주워 드네함께 함께 깊은 밤 떠다니네   ―――――――――――――――――――――――강은교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사상계』 등단.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초록거미의 사랑』 『바리연가집』 등. 등 수상.  『현대문학』 2015년 1월호, 206~207쪽.      김영태1 소묘집 『시인의 초상』(지혜네, 1998)에서.   80여 명의 시인을 소개한 『시인의 초상』에서 김영태 시인은, 강은교 시인에 대해 「반신반어, 인어처럼」이라는 제목.. 2015. 2. 12.
조율 「이달의 거리」 이달의 거리 조 율 우리, 달로 가자. 함께 한 숟갈 깊게 떠먹자. 모험 없이 달큰한 아이스크림 같은 방, 차가우면서 뜨거운 그런 참한 방. 봄이면 목련에 필라멘트를 꽂아 전등으로 달고 애들 볼 성인만화 장바구니에 가득 채워 애들처럼 보자. 숟가락 두 개 들고 붙는 거리, 평생치 눈물은 딱 그 거리만큼만 긷고 웃자. 어느 날 젖은 빨래로 오늘의 운명을 단정히 개어놓는 나를 발견하면. 다림질로 다리고 다리다 끝내 깊은 밤하늘의 새까맣게 젖은 바짓단을 다려내자. 굽이굽이 접어놓았던 그 길, 그 신통방통한 다리미로 늘여내자. 아득한 옛집 번지수가 촘촘하게 수놓인 그 가슴께 주머니, 더듬자. 뜨겁고도 지그시 눌러 펴자. 한 손으로 휘어잡아 뽑아버린 코드 놓고 슬프게 도망가는 밤이 와도 이내 돌아올 당신과 나의 .. 2015. 1. 25.
박강우 「그림 일기」 그림 일기 -2014년8월27일 수요일 날씨 맑음 박강우 아빠는 눈이 세 개다 나는 눈은 두 개다 왜 그럴까 엄마는 눈이 한 개다 하지만 동생은 눈이 두 개다 아빠와 엄마의 눈을 합해서 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두 개씩 나눠 가진 걸까 삼촌은 이마에 뿔이 있다 아빠는 이마에 뿔이 없다 그런데 삼촌은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삼촌은 뿔이 달린 동물을 좋아한다 나도 뿔이 달린 동물을 좋아한다 혹시 나의 이마에도 뿔이 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 세수를 하며 이마를 만져본다 뿔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엉덩이에서 꼬리가 나려고 한다 삼촌은 옷 속에 꼬리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삼촌은 왜 엄마와 아빠보다 삼촌을 좋아해야 한다고 하는 걸까 삼촌은 변태일까 선생님은 엄마와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 2015. 1. 6.
이태수 「눈(雪)」 2013.12.26. 영동사거리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현대문학』.. 2014. 12. 10.
문효치 「개망초」 개 망 초 ― 황사 온 날 문 효 치 산책을 하다가 목에 가래가 걸려 무심코 뱉어 버렸더니 개망초꽃에 달라붙어 너울거렸다 그래도 개망초꽃은 웃고만 있었다 천성이 좋은 건 지 부아를 꾹꾹 누르고 있는 건 지 제 얼굴에 오물을 뱉었는데도 웃고만 있다 흔하디 흔한 풀꽃인데 정말 흔치 않은 웃음으로 나를 가르치고 있다 남 가르치는 일이 내 직업인데 오늘은 도리어 또 한 수 배우게 되었다 『현대문학』 2014년 9월호, 179쪽. 시인의 얘기는 분명해서 듣기 거북할 건 없습니다. 더구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내 마음도 저와 같다"고 해버리면 좋겠지만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내게 가래침 뱉는 꼴을 그냥 봐 넘길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너.. 2014. 11. 9.
박두순 「사람 우산」 사람 우산 집에 오는 길 소낙비가 와르르 쏟아졌다 형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때 형이 우산이었다. 들에서 일하는데 소낙비가 두두두 쏟아졌다 할머니가 나를 얼른 감싸 안았다 그때 할머니가 우산이었다. 따뜻한 사람 우산이었다. 내 친구 박두순 시인이 낸 동시집의 표제작입니다. 작품에 대해 얘기를 할 형편은 아니니까 딴 얘기나 하겠습니다. 동시를 읽어보면, 사물이나 사회현상을 단순화하는 것 아닌가 싶을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단순화"라는 건 보다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어른들하고 이야기하고, 일을 도모하고, 놀고 하다가 아이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일을 도모하고, 놀고 하면, 일단 정직해져야 하고, 그러니까 속일 수가 없고, 마음이 편해지고 하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건 내가 초등학교.. 2014. 10. 7.
박형권 「탬버린만 잘 쳐도」 탬버린만 잘 쳐도 박형권 옆방 젊은 여자하고는 이사 첫날부터 찌그려졌다 이삿짐 다 옮겨놓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보니 출입문이 두 개 있는데 어느 문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 문이나 열긴 열었는데 꽃 같은 장롱에 복어 주둥이 같은 살림살이들 아, 이 문이 아니었다 얼른 닫고 옆문을 여니 마누라 같은 두루마리 화장지 딸 같은 시집詩集 그래 여기가 내 집이지 한시름 놓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린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여자들만 사는 집을 왜 들여다봐?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 인연은 일 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할머니 한 분과 여자와 여자의 어린 딸이 사는 것 같은데 모두 가을바람 앞의 코스모스 같았다 이슬만 먹고 사는지 그 방에서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며칠째 옆방에서 탬버린 소리가 .. 2014. 10. 4.
「목욕탕 수건」 목욕탕 수건 이재무 얼마나 많은 몸뚱어리를 다녀온 면수건인가 누군가의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와 등짝과 발바닥을 닦았을 면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는다 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와 등짝과 발바닥을 닦은 이 면수건으로 누군가는 지금의 나처럼 언젠가 머리를 털고 얼굴을 닦을 것이다 목욕탕 면수건처럼 사람들의 속살을 구석구석 살갑게 만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면수건처럼 추억이 많은 존재도 없을 것이다 면수건처럼 평등을 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닦고 나면 무참하게 버려지는 것들이 함부로 구겨진 채 통에 한가득 쌓여 있다 ―――――――――――――――――――――――――――――――――――――――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문학』 등단. 시집 『벌초』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몸에 피는 꽃』 .. 2014. 9. 14.
김원길 「여숙旅宿」「밀어」「시골의 달」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이 이런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렇지만 결코 그리 깔끔할 것도 없는, 그 시절의 이른바 '무전여행'이란 것의 추억을 멋들어진 시 한 편으로 간직할 수 있는,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추억은 메마르고 저 맥고모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방랑시편 (1) 「여숙旅宿」 10월 하순, 오후 4시 경, 박영태와 나는 영덕서 강구로 넘어가는 바닷가 비포장 언덕길을 터덜터덜 힘겹게 걷고 있었다. 땀이 흐르고 숨도 차고, 어디 앉아 쉴 만한 그늘이 없나 하던 차에 길가에 문짝이 떨어져 나간 초가삼칸 폐가가 눈에 띄었다. 그 폐가의 먼지 앉은 냉방에는 누가 배고 간 것인지 모를 목침이 나딩굴고 벽에는 낡은 맥고모자가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처럼 묵.. 2014. 9. 6.
문인수 「명랑한 거리」 명랑한 거리 문인수 이 시를 쓸려면 여기, 한 식당을 소개할 수밖에 없겠다. 아구찜 대구찜 알곤찜 황태찜 해물찜 등 찜전문집이다. 이 '누나식당' 주인 처녀는 키가 크다. 말만 한 건각에 어울리게시리 무슨 산악회 회원인데, 산 넘고 산 넘은 그 체력 덕분인지 껑충껑충, 보기에도 씩씩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까지 그저 서너 번 이 집에서 밥 사 먹었을 뿐이니 뭐, 단골이라 할 것도 없다. 오늘 저녁답에도 이 식당을 찾았으나 말짱 헛걸음했다. 문을 닫았다. 어, 잘되는 가게였는데……? 걸어 잠근 출입문 손잡이 위쪽에 뭐라 쓴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집을 찾아주시는 고객님들께 죄송한 말씀 전합니다. 2011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잠시 휴업합니다. 12월 17일(토) 저, 시집.. 2014. 8. 20.
채성병 「연안부두 가는 길」 연안부두 가는 길 인적 드문 보도블록 사이로 삐죽삐죽 살아남기 위해 꽃을 피우는 들풀들 바람에 날린다 짙은 향기 아니더라도 아름답구나 차마 비껴가는 발길들 틈에서 어째 아름답구나 어느새 떨어진 해 바닷가 지는 노을빛 받아 더욱 노란 풀꽃들 모질게 아름답구나 김영승 시인이 채성병의 시집 『연안부두 가는 길』(책나무, 1994)에서 뽑아 『現代文學』 2014년 5월호(206~207쪽)에 소개한 시 이 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왜 키가 좀 크고 잔잔한 노란 풀꽃이 있지 않느냐고 할 줄 알면서도, 이 사진을 실었습니다.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연안부두 가는 길」인가 싶었는데, 김영승 시인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천 연안부두 가는 길의 뱃고동 소리는, 인근 남향에서 쏟아져 나오는 .. 2014.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