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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사인 「노숙」

by 답설재 2015. 2. 25.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 시집 맨 앞 이 시를 읽으며 서정시, 실험적인 시, 사회적 혹은 정치적인 시 들 중에서 나는 아무래도 서정시밖에 읽을 수가 없다는 걸 또 생각했고―서정시도 아주 잘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김사인의 「풍경의 깊이」는 박재삼의 저 「천지무획(天地無劃)」 같은 여러 시들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놓고 다른 일에 파묻혀 이 시집을 덮었는데, 『현대문학』 1월호에 이 시인의 신작 시 한 편이 실려 있는 걸 봤고, 특집 「2000년대의 한국 문학」에도 문태준 시인과 함께 2000년대 서정시의 대표 시인으로 소개되었습니다.*

 

1981년 『시와 경제』 창간 동인으로 출발한 김사인은 『밤에 쓰는 편지』(청사, 1987)로 주목을 받았으나 1990년대 내내 새 시집을 출간하지 못하다가 첫 시집 이후 2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2000년대가 산출한 가장 탁월한 시집 중 하나에 속한다. 한국 서정시가 100년 동안 세공해온 말부림 기술의 한 절정이 여기에 있고, 동시에,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고착화된 서정시의 문법을 어느 한 모서리에서는 슬쩍 깨는 '파격의 품격'이 또한 여기에 있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노숙」은 위 글의 예문으로 소개된 시입니다.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파산한 듯 보이는 중년의 남성 화자는 자신의 삶이 결국 제자리로,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는 사실에 난감해 하는 중이다. …(중략)… 김사인의 이 시는 (시인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 소위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2000년대 중반에 중년의 연령대에 진입하면서 느끼는 피로와 고독을 스스로 들여다본 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노숙」은 저 시집에 두 번째로 실려 있습니다. 이제 기회가 되면 세 번째 시 「코스모스」를 볼 차례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다 볼 수 있게 될는지…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현대문학』 1월호에 소개된 시는 제목이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로 우리로서는 읽기조차 좀 고약한 점이 있는데, 시를 읽어보면 누구나 아는, 이름만 그렇지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이야기였습니다.4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다음 생은 노르웨이에서 살겠네.

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

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고여덟 배불뚝이 오한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

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

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길어질 때

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

브뤼겐 지나 시장 옆 좌판에서

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

싱겁게 몇 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골목 입구도 좋고

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

밤 두 시

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

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이겠네.

미끄러질듯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 시

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

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

나, 요한센(아니면 귈라 유하츠도 괜찮은 이름)

오줌을 누며 잠시 막막한 느낌에 잠기리.

북쪽 산골의 늙은 부모와 엇나가기만 하는 작은아이 생각,

진저리 치고 머리를 긁으며

다시 둑 위로 올라서네.

자, 어디로 갈까.

 

뜨개질은 건성인 채 밖을 자주 내다보는,

눈발 속 키 큰 그림자를 보고

달려 나오는 여자가 하나쯤 있어도 좋아.

'요한나!'

전쟁에서 살아온 제대군인처럼

내가 팔을 벌리겠지 술 냄새를 풍기며.

눈 덮인 내 등을 틀며 맞아들이는

집이 하나.

 

저쪽

노르웨이나 핀란드

아니면 그린란드쯤에라도.

 

 

 

――――――――――――――――――――――――――――――

김사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1982년 『시와 경제』 등단.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눈물겨운 바 없진 않지만 '미끄러질듯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니 나도 그리 살자, 생각합니다. 뭐 이까짓 것들을 가지고… 올해도, 아니, 다음에 이 세상을 또 살아간다 해도 역시 이럴 것이고, 살아간다는 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데…

 

 

 

* 신형철, 「2000년대 한국 시의 세 흐름-깊어지기, 넓어지기, 첨예해지기」(『현대문학』 2015년 1월호 「특집-2000년대의 한국 문학」), 386~406쪽.

** 위의 책, 390쪽.

*** 위의 책, 390-391쪽.

**** 『현대문학』2015년 1월호, 210-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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